[아이뉴스24 이한얼 기자] 미국 함정시장의 문이 K조선에 한층 더 넓게 열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미국 조선산업에 투자한 외국 조선사가 본국 조선소에서 미국 선박을 최대 2척까지 건조할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다.
미국 현지 생산 기반이 자리 잡기 전까지 한국에서 초기 물량을 만들어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으로, 필리조선소를 확보한 한화를 비롯해 HD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의 미국 함정시장 진출에도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13일(현지시간) 미국 조선산업 재건을 위한 국가안보각서에 서명했다. 미국에 신규 조선소를 건설하거나 기존 조선소의 소유권 또는 과반 지분을 확보한 외국 조선업체가 본국에서 미국 선박 최대 2척을 건조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번 각서의 핵심은 미국이 자국 조선소만으로 부족한 생산능력을 외국 조선사의 기술과 생산 기반을 활용해 보완하겠다는 데 있다.
그동안 미국 함정시장은 미국 내 건조가 사실상 전제돼 국내 조선사가 높은 기술력과 생산능력을 갖추고 있어도 시장 진입에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
하지만 이번 조치로 미국에 투자한 외국 조선사는 현지 조선소의 생산능력이 충분히 갖춰지기 전까지 본국에서 초기 물량을 건조할 수 있게 됐다. 한국 조선사 입장에서는 미국 현지 생산을 준비하면서 동시에 국내의 높은 건조 경쟁력을 활용해 미국 선박을 공급할 수 있는 길이 열린 셈이다.
다만 한국에서 미국 함정을 계속 건조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본국 건조는 최대 2척으로 제한되며 이후 물량은 미국 조선소에서 생산해야 한다.
미국인 고용과 훈련, 현지 공급망 구축 등 조건도 충족해야 한다. 미국 국방부는 90일 이내 구체적인 조달 방안을 마련할 예정이다.

가장 직접적인 수혜가 예상되는 곳은 한화다. 한화오션은 지난해 미국 필라델피아의 필리조선소를 인수하며 이미 미국 현지 생산거점을 확보했다. 필리조선소에 50억달러를 추가 투자해 연간 건조능력을 현재 1~1.5척 수준에서 20척까지 확대한다는 계획도 추진하고 있다.
이번 조치가 현실화하면 한화는 초기 물량을 한국에서 건조한 뒤 후속 물량을 필리조선소에서 생산하는 방식의 사업 모델을 구축할 수 있다. 미국 현지 조선소의 생산능력을 끌어올리는 동안 한국의 생산 기반을 활용할 수 있어 미국 함정시장 진입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의미다.
한화가 추진 중인 미국 방산 조선사 오스탈USA 인수도 변수다. 인수가 성사될 경우 한화는 필리조선소에 이어 미국 내 함정 생산 기반을 추가로 확보하게 된다. 미국 현지 생산거점을 늘리면서 향후 미 해군과 해안경비대 함정 수주 경쟁에서도 유리한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HD현대중공업과 삼성중공업도 수혜 가능성이 거론된다. HD현대중공업은 미국 방산 조선사 헌팅턴잉걸스와 함정 건조 및 조선소 현대화 협력을 진행하고 있다. 삼성중공업 역시 미국 조선업체들과 무인수상정과 선박 유지·보수·정비(MRO) 분야 협력을 확대하며 미국 시장 진출을 준비하고 있다.
특히 이번 조치는 국내 조선사들이 미국에서 단순히 선박을 수주하는 것을 넘어 한국의 건조 기술과 생산 경험을 미국 현지 사업에 연결할 수 있는 통로가 넓어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미국 입장에서도 한국 조선사의 참여는 생산능력 부족을 보완할 수 있는 카드다. 미국은 군함을 비롯한 선박 생산능력을 확대해야 하지만 조선소와 숙련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다. 한국 등 조선 강국의 기술과 생산성을 활용하면서 미국 내 조선소와 인력을 동시에 키우는 전략을 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이번 조치가 곧바로 국내 조선사의 미국 함정 수주 확대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초기 2척 이후에는 미국 현지에서 생산해야 하는 만큼 현지 조선소의 생산능력 확대와 인력 확보, 공급망 구축이 핵심 과제로 남는다.

업계에서는 이번 각서가 단순한 '한국 내 미국 함정 건조 허용'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보고 있다. 미국이 자국 조선산업을 되살리는 과정에서 한국 조선사의 기술력과 생산 기반을 적극 활용하겠다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조선업계 관계자는 “미국이 자국 조선소만으로는 부족한 생산능력을 외국 조선사의 기술과 생산 기반을 활용해 보완하려는 것”이라며 “한국 조선소에서 초기 물량을 건조할 수 있게 되면 미국 함정시장 진입의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미국 현지 투자와 현지 생산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단순히 국내에서 함정을 건조할 수 있게 됐다는 의미로만 봐서는 안 된다”며 “향후 미국 내 조선소의 생산능력 확대와 인력 확보, 현지 공급망 구축까지 병행해야 실질적인 수주 경쟁력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한얼 기자(eol@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