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박지은 기자] 영화 '빅쇼트'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투자자 마이클 버리는 지난해 말 인공지능(AI) 투자 열풍에 의문을 던졌다. 비싼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사도 2~3년이면 더 좋은 신제품이 나오는데, 빅테크가 투자한 돈을 제대로 회수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특히 버리는 빅테크들이 GPU 등 AI 서버의 실제 사용 기간보다 긴 기간을 적용해 감가상각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경제적 수명이 2~3년에 불과한데 이를 5~6년에 걸쳐 비용으로 나누면 매년 반영되는 감가상각비가 줄어들고, 그만큼 기업의 이익이 실제보다 커 보일 수 있다는 논리다.
예를 들어 100억원짜리 장비를 2년 쓴다고 보면 매년 50억원을 비용으로 잡아야 하지만, 5년이면 연간 비용은 20억원으로 줄어드는 식이다.

그는 이런 회계처리로 2026~2028년 빅테크들의 감가상각비가 적정 수준보다 총 1760억달러가량 적게 반영될 수 있다고 추산하기도 했다.
이 주장은 AI 투자에 대한 의구심으로 번졌고 반도체 기업들의 주가까지 흔들었다. 지난해 11월 AI 거품 우려와 미국 기술주 조정 등이 겹치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큰 폭으로 조정을 받았다.
시장의 관심도 빅테크들이 천문학적인 AI 투자를 얼마나 오래 이어갈 수 있느냐에 쏠렸다. 하지만 약 9개월이 지난 지금 버리의 계산과 다른 사례가 등장했다.

6년 된 A100, 2029년까지 돈 번다
주인공은 엔비디아의 'A100'이다. 2020년 출시된 A100은 호퍼(Hopper), 블랙웰(Blackwell) 등 여러 세대의 제품들 이전에 나온 구형 GPU다.
그런데 AI 데이터센터 업체 코어위브는 최근 2분기 실적 발표에서 A100 기반 컴퓨팅 자원에 대해 2029년까지 이어지는 신규 계약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출시 6년째인 GPU가 앞으로 3년을 더 돈을 벌게 된 것이다.
미국 IT 매체 톰스하드웨어는 이를 두고 "2020년 출시된 노후 AI GPU가 배치 9년 뒤에도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고 평가했다. 비즈니스인사이더도 A100 계약이 "AI 칩의 수명이 짧다는 통념에 도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신 GPU가 나온다고 기존 제품을 버릴 필요가 없다는 점도 주목받고 있다. 최신 제품은 대규모 AI 모델 학습 등 고성능 연산에 투입하고, 구형 GPU는 상대적으로 연산 부담이 낮은 추론 등에 다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번스타인의 스테이시 라스곤 애널리스트는 "3년 뒤면 망가지고 쓸모없어진다는 생각은 말도 안 된다"며 구형 GPU가 "매우 높은 수익성을 내면서 사용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도 A100을 직접 거론했다. 황 CEO는 최근 엔비디아의 소프트웨어 플랫폼 쿠다(CUDA)를 활용하면 GPU 세대가 바뀌어도 기존 장비의 성능을 개선하고 다양한 작업에 활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를 통해 GPU가 임대 가능하고 오래 사용할 수 있으며 금융조달까지 가능한 생산자산이 된다는 설명이다.

GPU에 돈 대는 월가…버리는 다시 '거품' 경고
월가도 AI 컴퓨팅을 하나의 투자자산으로 보기 시작했다.
엔비디아는 최근 아폴로·블랙록·블랙스톤·브룩필드·골드만삭스·KKR 등 대형 금융사 6곳과 독립적인 AI 컴퓨팅 금융 플랫폼을 구축하기로 했다. 장기적으로 5000억달러 이상의 제3자 자본을 AI 인프라 시장에 동원하는 것이 목표다.
5000억달러를 엔비디아가 직접 투자하거나 이미 확보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금융기관들이 AI 데이터센터의 고객과 수요, 가동률, 수익성 등을 따져 투자하고 엔비디아는 GPU와 네트워크, 소프트웨어를 묶은 'AI 팩토리'를 제공한다.
버리는 이번에도 반대편에 섰다. 이 같은 금융 구조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월가의 금융공학과 닮았다며 다시 AI 거품론을 제기한 것이다.
그는 "AI 인프라 수요가 예상에 미치지 못하면 금융시장까지 위험이 번질 수 있다"고도 주장했다.

구형 GPU까지 계속 쓴다…메모리 수요는?
A100의 장기 활용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곧바로 새로운 메모리 판매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기존 GPU를 오래 사용하는 만큼 신제품 교체 수요가 늦춰질 가능성도 있다.
다만 현재 AI 시장에서는 구형 GPU를 신제품으로 교체하기보다 기존 장비를 추론 등에 계속 활용하면서 최신 GPU를 추가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AI 컴퓨팅 수요가 공급을 웃돌고 있어서다. 이 같은 방식으로 데이터센터가 확장된다면 새로 설치되는 GPU에 필요한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서버용 D램, 기업용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eSSD) 수요는 계속 발생할 수 있다.
삼성증권은 "구형 GPU도 워크로드 믹스 변화와 공급 부족 속 유효한 수익화 자산으로 존재한다"며 계약 연장과 단기 임대, 관리형 추론 등으로 재활용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SK증권도 "컴퓨트(Compute)는 소모품이 아닌 금융 가능한 자산으로 변모하고 있다"며 "6년 지난 A100 기반 자원도 2029년까지 장기 계약되고, 구형 GPU 가격 역시 의미 있는 수준을 유지 중"이라고 분석했다.
메모리 업황에 대해서는 "이제 '가격'뿐 아니라 '지속성, 가시성'으로도 업황 강세를 흡수하는 시대"라며 가격 상승률 둔화만을 근거로 메모리 호황의 고점을 판단하는 시각을 경계했다.
/박지은 기자(qqji0516@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