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서병기 기자] 그리스 로마 문화는 서양 문화의 근원이다. 그리스 문화의 특징은 '인간중심적, 합리주의적, 운명 탐구적, 현세 긍정적'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신과 내세 중심인 유럽의 중세를 거쳐 14~16세기 유럽에서 탄생해 근대 유럽의 출발점이 된 ‘르네상스’(재생, 부흥의 뜻)도 그리스, 로마문화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고대 그리스는 연극도 인간의 운명과 고뇌, 진실을 마주하기 좋은 비극 장르의 전성시대였다. 비극작가로는 아이스퀼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가 맹활약했다. 당시에는 비극만을 연기하는 배우가 따로 있었고, 비극 전문 배우는 한수 위의 대접을 받았다.
고대 그리스의 중심지는 폴리스의 패권에 따라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시대로 추이가 옮겨진다. 비극 전문 작가인 소포클레스의 대표적 고전 비극인 ‘오이디푸스’는 테베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요즘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M씨어터에서 열리고 있는 연극 ‘오이디푸스’는 동명의 그리스 비극의 정수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조금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기 위한 작품이다.
필자는 최수종이 ‘오이디푸스’ 역을 맡았던 지난 21일 무대를 직관했다. 최수종은 이미 발해(대조영), 신라(김춘추), 고려(왕건), 조선(철종) 등 국내 사극의 왕 역을 섭렵하고 이제 서양의 왕까지 도전했다.
최수종은 역사속에서 왕만 연기한 건 아니다. 사도세자, 장보고 외에도 고려 귀주대첩의 강감찬, 조선 한산도대첩의 이순신 역을 맡아, 고구려 살수대첩의 주역인 을지문덕 역만 하게 되면 한국사 3대 대첩을 달성하게 된다.
최수종은 한 인터뷰에서 “사도 세자의 아버지인 영조와 대원군, 광해군 역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왕 역할 보다는 양면성이 있는 역사속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최수종이 오이디푸스 배역을 맡은 건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본다. 왜 이 인물이 이럴 수밖에 없었는지를 끊임없이 생각하면서 연기한 흔적이 역력하다.
최수종이 맡았던 국내 사극 드라마속 왕은 권력의 정점에 서서 위엄과 카리스마를 보여준 왕이었다면, 연극속의 왕은 가혹한 운명 앞에 무너지는 인간으로 오히려 애도의 감정이 생겨날 정도다. 관객에게도 절대자 ‘왕’으로서가 아닌 분열하는 인간 ‘오이디푸스’에게 집중하게 만든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3대 왕인 라이오스 왕과 이오카스테 왕비 사이에서 고귀한 왕자로 태어났으나,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는 저주의 신탁(神託 신이 사람을 매개자로 하여 그의 뜻을 나타내거나 인간의 물음에 대답하는 일)을 내놓자, 라이오스 왕은 갓 낳은 아이를 양치기에게 넘겨주며 죽이라고 명한다는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인간의 오만과 운명, 진실과 파멸을 다룬 작품으로서는 강렬하고 묵직하다.
우선 최수종이 90분내내 그렇게 많은 대사를 완전히 외워 소화하는 게 놀랍다. 대사도 귀에 쏙쏙 들어온다. 2017년 '하늘로 가지 못한 선녀씨 이야기' 이후 9년 만에 연극 무대로 복귀했지만, 긴 공백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번 경험은 최수종이 그동안 주력해온 매체연기와 보완적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연극 ‘오이디푸스’는 운명 앞에 선 인간의 의지와 진실을 향한 여정을 그리는데, 최수종은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내밀한 과거와 마주하는 과정을 호소력 있게 전달해 관객들을 이끌어나간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는 현대인들에게 담담히 현실 앞에 서는 오이디푸스의 인간성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연극 ‘오이디푸스’는 인간의 운명과 진실, 선택의 아이러니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종반 진실이 밝혀지자, 이오카스테(서영희 분)는 절망감과 수치심에 스스로 목을 매달고 오이디푸스도 스스로 눈을 찔러 실명한다.
오이디푸스는 운명을 자신의 '발'에게 물어본다. ‘오이디푸스’의 사전적 뜻도 ‘부은 발’이라는 의미다. 특히 최수종이 종반 “내 발아,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라고 하는 대사는 모든 진실을 마주한 뒤 고뇌하는 오이디푸스의 처절한 운명을 잘 보여주었다.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낸 그 유명한 수수께끼로, "아침(어릴 적)엔 네 발, 점심(젊은 시기)엔 두 발, 저녁(노년기)엔 세 발인 동물은 무엇인가?"라고 묻자 오이디푸스가 단번에 “인간”이라고 말하는 장면도 초반에 나왔다.

최수종은 연극 ‘오이디푸스’에서 때로는 절제력 있는 톤으로, 때로는 절규하듯 호소력 강한 말투를 바탕으로 치밀한 심리 묘사와 긴장감 있는 전개, 감각적인 무대 언어를 만들어내며 강렬한 연극적 체험을 선사했다. 특히 차마 마주하고 싶지 않은 진실 앞에서 그가 보여준 절규톤 연기는 고전 비극이 던지는 본질적인 질문을 오늘의 감각으로 풀어내 울림을 전하고 있다.
마치 오이디푸스가 지금 무대 위에서 살아있는 것처럼 열심히 연기를 펼치는 최수종은 퇴장하는 마지막까지 긴장을 놓치지 못하게 한다. 연극이 끝나고도 관객들이 뜨거운 기립박수가 이어졌다.
한편, 주인공 오이디푸스는 배우 최수종과 양준모가 더블캐스팅으로 나서 절대적인 존재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오이디푸스를 보여주고 있고, 혼란의 중심에 있는 또 다른 인물인 테베의 왕비 이오카스테는 서영희와 임강희가 맡았다.
배우 임병근과 이형훈의 '코러스장'은 시공간을 넘나들며 실마리를 제공하는 길잡이 역할을 하며 갈등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강성진과 최수형이 연기하는 오이디푸스의 처남 크레온이 날카롭게 제시하는 사건 전개도 집중도를 높이고 있다. 한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배우 박정자와 남명렬이 각각 시각장애인 예언자 테레시아스와 코린토스 사자 역을 맡아 작품의 무게감을 더했다.
특히 고대 그리스 비극의 핵심 장치인 코러스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해 단순한 해설자를 넘어 사건의 흐름과 감정을 이끄는 적극적인 존재로 확장한 것도 관전 포인트. ‘코러스장’을 중심으로 구현되는 집단의 시선은 인물의 내면과 사회의 시선을 교차시키며 극의 긴장과 리듬을 더욱 입체적으로 끌어올린다.
연극 ‘오이디푸스’는 지난 7월 4일부터 오는 8월 23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된다.
/서병기 기자(wp@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