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뉴스24 정종오 기자] 두 기업이 있다. 한 곳은 200쪽 분량의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 온실가스 배출량부터 이사회 다양성까지 수백 개 지표를 빼곡히 담았다. 다른 한 곳의 보고서는 30쪽에 불과하다. 실제 탄소 배출은 절반 수준이고, 협력사 노동환경도 더 낫다. 그런데도 ESG(환경, 사회적 책임, 투명한 지배구조) 등급은 전자가 더 높다.
이것은 가상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25년 발간한 Behind ESG Ratings: Unpacking Sustainability Metrics를 보면 ESG 평가에 활용되는 지표의 상당수는 기업이 어떤 정책과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지, 즉 ‘노력’과 ‘관리체계’를 측정한다.
반면 실제 배출을 얼마나 줄였는지와 같은 ‘성과’를 직접 측정하는 지표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낮다. 정성적 서술에 의존하는 부분도 적지 않다. 이는 ESG 평가의 단순한 한계라기보다, 기업 간 비교가 가능한 신뢰도 높은 성과 데이터가 아직 충분히 축적되지 않았다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김정남 수석전문위원(법무법인 화우 ESG센터). [사진=법무법인 화우]](https://image.inews24.com/v1/5f83bf53fcd67b.jpg)
ESG 평가기관은 기업이 환경·사회·지배구조 이슈를 얼마나 체계적으로 관리하는지를 본다. 이사회가 관련 위험과 기회를 감독하는지, 정책과 목표가 마련돼 있는지, 공급망 실사가 이루어지는지, 데이터 관리 체계와 내부통제가 작동하는지 등을 평가한다.
이런 요소는 분명 중요하다. 탄소 감축, 산업재해 예방, 인권 리스크 관리와 같은 성과는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 견고한 관리 체계가 있어야 성과도 지속될 수 있다.
관리 체계의 존재가 곧 성과를 보장하지는 않는다. 탄소중립 목표를 선언했다고 실제 배출량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협력사 행동규범을 제정했다고 현장의 노동환경이 자동으로 개선되는 것도 아니다.
정책, 목표, 교육, 인증, 위원회와 같은 요소는 기업의 준비도와 관리 역량을 보여주는 유용한 신호다. 다만 그것만으로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판단하기에는 부족하다. 이는 지속가능성의 최종 성적표가 아니라, 성과를 만들기 위한 기반에 가깝다.
그렇다고 ESG 공시와 평가의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측정되고 비교되며 질문받는다는 사실 자체가 기업을 움직인다. 이사회가 탄소 목표와 전환 리스크를 검토하고, CFO가 배출량 데이터의 정확성과 내부통제 수준을 점검하며, 구매부서가 협력사의 노동·안전 리스크 관리에 나서기 시작하는 변화는 공시와 평가가 없었다면 훨씬 더디게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ESG 공시는 기업의 지속가능성 수준을 완벽히 보여주는 종착점이라기보다, 경영의 시선을 위험과 기회가 발생하는 현장으로 돌리는 출발점이다. 평가가 관리 노력에 더 비중을 두든, 실제 성과에 더 무게를 두든, 누군가 지켜보고 비교한다는 사실 자체가 기업의 행동을 바꾼다. ESG 공시와 평가가 분명한 순기능을 갖는 이유다.
지금은 국내외에서 그 ‘공시’가 의무가 되는 전환점이다. 한국도 지속가능성 공시기준을 확정하고, 대형 상장사부터 단계적으로 의무공시를 도입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앞으로 기업은 온실가스 배출량, 기후 리스크, 지배구조, 주요 지속가능성 위험과 대응을 보다 일관된 기준에 따라 공시하게 될 것이다.
데이터가 일정 수준의 검증과 내부통제를 거치게 되면 자본시장의 정보 비대칭도 크게 줄어들 수 있다.
ESG 공시 의무화 시대에 바라는 바도 분명하다. ‘보고를 잘하는 경쟁’에 머물지 않고, ‘성과를 만들어내는 경쟁’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더 많이 공시한 기업이 아니라, 더 지속가능한 기업이 좋은 평가를 받는 것. 그것이 공시 의무화 시대에 기업과 투자자가 함께 붙들어야 할 기준이다.
김정남 수석전문위원(법무법인 화우 ESG센터) jnkim@yoonyang.com
/정종오 기자(ikokid@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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