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피크제 비상] 혼란 빠진 산업계…대법 판결 쟁점은


4가지 기준 적용 시 '정년연장형'도 사안에 따라 문제…'갑론을박' 속 부작용 우려

[아이뉴스24 장유미 기자] "정부에서도 제대로 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사회적 합의라 볼 수 있는 기준도 마땅치 않아 어떻게 대응해야 할 지 막막합니다. "

대법원이 최근 합리적 이유 없이 연령만을 기준으로 임금을 삭감하는 '임금피크제'가 무효라고 판결하자 곳곳에서 마찰음이 일고 있다. 경영계는 대법원 판단 이후 갈등이 심화될 것으로 보고 즉각 우려를 표했지만, 정작 정부가 입장을 제대로 내놓지 않아 기업들은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대법원이 최근 합리적 이유 없이 연령만을 기준으로 임금을 삭감하는 '임금피크제'가 무효라고 판결하자 곳곳에서 마찰음이 일고 있다. [사진=뉴시스]

4일 법조계에 따르면 임금피크제를 두고 가장 중점이 되는 네 가지 기준은 ▲도입 목적의 타당성 ▲불이익 정도 ▲임금 삭감에 상응하는 적절한 조치 ▲임금피크제로 감액된 재원이 본래 목적대로 사용됐는지 등으로 볼 수 있다.

도입 목적의 타당성과 관련해선 임금피크제 도입 목적이 임금 삭감이나 정리해고가 아니어야 한다는 점으로 해석되지만, 불이익의 정도에 대해선 임금 삭감 폭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어 논란이 되고 있다. 임금 삭감에 상응하는 적절한 조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업무량이나 업무 강도 완화가 적절한지에 대한 판단이 어려워 혼란을 준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감액 재원을 본래 목적대로 사용했는지에 대한 여부는 청년 고용 확대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판단은 비교적 쉽다.

기업들은 불이익의 정도, 임금 삭감에 상응하는 적절한 조치 부분에서 가장 난감해 하고 있다. 이 두 기준 때문에 소송 대란이 이어질 것으로 보여서다. 실제로 최근 대법원의 판단 이후 전국 로펌에선 임금피크제 소송을 문의하는 이들이 큰 폭으로 증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일부 지방에선 일찌감치 임금피크제 단체 소송 모집에 나선 로펌들도 속속 나오고 있다.

이는 최근 대법원의 판단이 기폭제가 됐다. 앞서 대법원은 지난달 26일 A씨가 과거 재직했던 B연구원을 상대로 낸 임금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일부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하면서 '합리적 이유 없이' 연령을 기준으로 근로자의 임금에 차등을 두는 것은 고령자고용법상 '차별'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

법무법인 세종 측은 뉴스레터를 통해 "이번 대법원 판결은 임금피크제 전반에 대해 무효를 선언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면서도 "다만 대법원이 임금피크제의 실체적 유효조건을 제시했다는 점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판결로 인해 임금피크제 대상이 된 직원들이 임금피크제의 유효성에 대한 법원의 판단을 구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며 "임금채권의 소멸시효가 3년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퇴직자들 또한 임금피크제 소송에 참여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노조가 한남동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자택 앞에서 연대투쟁을 위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사진=민혜정 기자]

이번 판결 이후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기업들에 대한 판단 기준에 대해서도 해석이 분분하다. 일부 기업들은 정년연장을 조건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관측했지만, 법조계에선 정년연장형 임금피크제도 사안에 따라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김상민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는 "이번 대법원 판결이 정년고정형 임금피크제에 대한 것이지만, 정년연장형에도 적용되는 지에 대해선 논란이 다소 있다"며 "대법원이 임금피크제 유효 여부에 대해 제시한 네 가지 기준을 제시한 만큼, 이를 토대로 하면 정년연장형이라고 해서 당연히 예외가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또 법조계에선 임금피크제를 희망퇴직과 연계해 운영하는 경우 임금피크제가 무효일 수 있어 희망퇴직을 신청하는 직원이 현저히 줄어들 수 있다고 분석했다.

김 변호사는 "임금피크제 진입이 희망퇴직 신청에 상당한 유인이 됐는데 임금피크제가 무효라면 그러한 유인이 없다"며 "희망퇴직 제도를 통해 인력 운영의 적정성과 신규 채용 확대 정책을 펴고 있는 회사들에게는 당장 희망퇴직 제도를 어떻게 운영할 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이번 대법원 판결 후 각 기업별 노조들이 들썩이고 있다. 사진은 지난 2019년 11월 공공운수노조 공공기관사업본부 회원들이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임금피크제 지침 즉각 폐기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재계에선 이번 일로 기업이 불필요한 법적 분쟁에 휘말리게 될 뿐 아니라 기업 부담이 가중될 것으로 예상했다. 또 인건비 부담 영향으로 결국 신규 채용도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대한상공회의소 관계자는 "임금피크제는 연공급제(호봉제) 상황에서 불가피한 조치였다"며 "이를 무효화하면 청년일자리, 중장년 고용불안 등 정년연장의 부작용이 심각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더욱이 줄소송사태와 인력경직성 심화로 기업 경영부담이 가중되고 경쟁력이 떨어질 것이 우려된다"며 "임금피크제를 의무화하는 고령자고용촉진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재계의 우려대로 이번 대법원 판결 후 각 기업별 노조들은 들썩이고 있다. 특히 삼성디스플레이 노조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당일 "대법원 판단에 의거해 임금피크제의 운영 여부와 임금 보전 방식에 대한 설명을 달라"는 취지의 공문을 사측에 발송했다. 이번 판결에 대해 회사 측에서 어떻게 해석하는지, 현재 실시하고 있는 임금피크제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등 회사의 입장에 따라 대응 방식을 결정하기 위해서다.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다른 기업들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현재 직원 300인 이상 국내 기업 중 52%가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상태로, 삼성전자와 LG전자, 현대자동차, SK텔레콤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 삼성전자 내 최대 노조인 전국삼성전자노조 측은 임금피크제를 다시 이슈화하고 나섰다. 삼성전자는 2014년 정년을 60세로 연장하면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상태로, 만 55세부터 전년 대비 임금을 10%씩 줄여나가는 방식에서 현재는 만 57세부터 5%씩 삭감하는 것으로 임금 삭감율을 완화한 기준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노조 측은 지난해 임금교섭 당시 이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또 대법원 판결 하루 뒤인 지난달 27일에는 '임금피크제 무효 판결 미지급 임금 청구 모임'이라는 인터넷 카페도 생겼다. 소송을 준비하는 커뮤니티도 늘어날 것으로 관측된다.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은 "(대법원이) 연령에 차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임금을 삭감하는 것은 차별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줬다"며 "이날 판단을 계기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는 현장의 부당한 임금피크제가 폐지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재계 관계자는 "대법원 판결이 임금피크제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닌데도 이를 계기로 폐지를 주장하려는 노조가 늘어날 조짐을 보이면서 기업들이 긴장하고 있다"며 "판단을 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이 없어 기업들이 많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기재부가 발표했던 임금피크제 등 임금체계 개편을 통한 청년 고용여력 확보안 [사진=기재부]

일각에선 정부의 모호한 입장과 안일한 대응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다. 또 정부의 지침에 따라 임금피크제를 선제적으로 도입했는데 이제 임금피크제 폐지를 논하는 현실에 당황스럽다는 의견도 나왔다.

고용노동부는 최근 참고자료를 통해 "정년유지형 임금피크제가 모두 무효인 것은 아니다"며 "임금피크제 효력은 각 기업에서의 판단기준 충족 여부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 있다"고 밝힌 바 있다.

A기업 관계자는 "박근혜 정부에서 노사 간 상생 모델로 임금피크제 확대를 적극 권장하며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 아니냐"며 "이제 와서 기업들이 마치 잘못한 것처럼 비춰지는 것이 다소 억울하다"고 말했다.

재계 관계자는 "법원 조차도 임금피크제와 관련해 판결이 엇갈리고 있는 상황"이라며 "정부도 법원이 향후 관련 재판에서 어떤 판단을 내릴 지 몰라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는 듯 하다"고 밝혔다.

또 그는 "임금피크제와 관련된 재판들이 앞으로도 몇 번 더 진행돼야 기준이 바로 세워질 듯 하다"면서도 "정부가 이번 대법원 판결에서 제시된 네 가지 요건을 구체화한 가이드라인을 하루 빨리 만들어 현장 혼란을 최소화하는 데 집중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장유미 기자(sweet@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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