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장과 중국 기업은 엄연히 다른 존재다. 그러나 우리는 그 동안 시
장만 쳐다보고 왔다. 그러다 보니 기업을 놓쳤다. 중국 기업은 이미 등뒤에
서 우리를 바짝 추격하고 있는데, 그 사실을 몰랐다."
삼성전자 고위 관계자의 '중국론(中國論)'이다. 그는 "통신, 특히 CDMA에
관한 한 '중국은 우리보다 한 수 아래'라는 지금까지의 인식은 잘못됐
다"며 "중국을 다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 기업은 후발 업체가 아
니라 우리가 상대해야 할 가장 강력한 경쟁자"라는 설명이다.
통신 기기 업계에 '중국 경계론'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중국 차이나유니콤
이 발주한 CDMA 시스템 입찰에서 '낙마'한 LG전자는 '중국 경계론'이 뼈에
사무칠 정도다. 이 회사 고위 관계자는 "중국 기업은 기술이전의 대상이 아
니라 강력한 경쟁자였다"며 전략 실패를 자인했다.
◆중국의 만만디 CDMA 정책의 실체
중국 특유의 만만디(慢慢的)즘은 CDMA 정책에서도 그대로 반영됐다.
국가적으로 CDMA 도입을 최종 결정하는 데 2년 이상이 걸렸다. 그 동안 기
술 보유국인 미국과 한국은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시장 규모가 엄청
난 만큼 조속히 진출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컸기 때문이다.
중국은 그러면서도 겸손하기까지 했다. 기술을 얻기 위해 겸허하게 고개를
숙일 줄 알았다. 우리가 착각한 부분은 바로 이 대목이다. 중국의 기술은
정말 낙후됐고 경쟁자로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실제로 후웨이꾸이 중국 중흥통신 총재는 여러 차례 한국을 방문해 "CDMA
상용화 종주국인 한국의 기술을 배워 2세대 CDMA 및 3세대 이통통신에 대비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니 기술을 지원해 달라"는 뜻이었다.
당시만 해도 국내에서는 이를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하루 속히 중국 기업
과 손을 잡고 거대한 황무지를 개척하고 싶은 욕심이 컸기 때문이다. 또 중
국 기업과 손을 잡지 않으면 중국 땅에 들어갈 방법도 없었다.
그래서 중국에 기술을 주겠다는 업체가 한 두 곳이 아니었다. 그 중 중흥통
신과 손을 잡은 곳은 LG전자와 퓨처텔이라는 벤처기업이었다. 그 외 많은
중국 통신장비 업체도 국내 업체로부터 겹치기로 구애를 받았다.
하지만 그로부터 2년여 뒤. 중국 정부와 기업의 만만디즘은 서서히 그 실체
를 드러냈다. 대표적인 것이 중국 차이나유니콤의 CDMA 장비 입찰.
2년전만 해도 CDMA 기술이 전무했던 중국 중흥통신은 그 사이 '기술독
립'을 실현했다. 삼성전자와 함께 CDMA 최초 상용화 주역 중 하나인 LG전자
를 제치고 차이나유니콤 장비 납품권을 따내는 데 성공했다.
중흥통신은 특히 차이나유니콤 장비 입찰에 LG와 공동 참여키로 철썩같이
약속을 했던 상황이다. 그러나 중흥통신은 얼토당토 않은 이유로 LG와 약속
을 파기해 버렸다. 그리곤 LG의 꿈을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아직 구체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LG와 중흥의 사례'는 머잖아 다른
제휴에서도 재현될 것이라는 게 중국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무시할 수 없는 중국 CDMA 장비 업체
삼성전자 관계자는 "중흥통신이 LG전자를 제치고 차이나유니콤의 장비 납품
권을 획득했을 때만 해도 기술력을 반신반의했다"고 말했다. 장비를 납품하
더라도 버그 때문에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봤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이같은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최근 홍콩 싱가포르 등에서 잇따라 열린 통
신기기 전시회에서 '중흥의 기술자립'을 실감했기 때문이란다.
중흥통신은 최근 전시회에서 잇따라 cdma 2000 1x 장비를 선보였다.
"아직 상용화하기에는 조금 미약해보이기는 하지만 결코 국내 수준보다 낮
다고 볼 수 없다"는 게 그의 관전기였다. 1x 장비는 루슨트같은 세계적인
업체도 국내 커스트마이징에 애로를 겪었던 분야. 옛 현대전자의 경우 버
그 때문에 통째로 철거되는 수모를 당할 만큼 고난이도의 기술을 요한다.
이 때문에 국내에서도 1x 상용화가 1년 가량 지연된 바 있다.
중흥 뿐만이 아니다. 동방통신, 수신그룹, 대당텔레콤, 화웨이 등 주요 통
신기기 업체의 기술력이 이미 국내 수준에 육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당은 IS-95A는 물론 1x 장비를 이미 보유하고 있으며, 동방통신도 98년부
터 CDMA 장비를 개발해와 이미 상용화 단계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수
신그룹도 98년에 이미 CDMA 기지국 보조장비를 완성한 상태다.
삼성전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기업이 이렇다할 실적을 보여주지 못하는 국
내 현실과는 대조적이다. 국내 기업이 구조조정의 회오리를 통과하는 동안
중국 기업들은 승승장구할 터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 CDMA 장비 업체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비단 기술 때문만이 아니
다. 중국 업체는 국내 기업이 갖지 못한 장점도 많이 갖고 있다.
우선 거대한 내수시장이다. 13억 인구를 바탕으로 한 엄청난 내수 시장이
필연적으로 중국 기업의 체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할 게 뻔하다. 국내 시
장이 포화 상태에 이른 것과 아주 대조적인 현상이다.
또 저렴하면서도 양질의 노동력을 꼽을 수 있다. 배광선 산업연구원장
은 "중국의 경우 인건비가 우리 나라의 13분의 1밖에 안된다"며 "여기에 선
진기술과 외국자본이 결합되면 엄청난 파괴력을 보일 것"이라고 말했다.
천진환 전 LG그룹 중국본부 사장도 "기술과 자본이 결합된 중국 기업이 역
으로 한국에 수출하거나, 미국 등 한국의 수출 대상국에서 가장 강력한 경
쟁자로 나설 날이 멀지 않았다"고 경고했다. 특히 김진현 무역협회 객원연
구원은 "한국은 그동안 IMF 때문에 구조조정을 단행했지만 머잖아 중국 요
인에 의해 구조조정을 해야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 충고했다.
◆중국을 앞서가는 길
통신 분야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기술이전'과 '기술유출'을 구별하는 것이
라는 지적이 많다. 특히 중흥통신의 경우 2년이라는 단시일내에 국내 기업
에 못잖은 기술을 획득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기술유출'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중흥의 경우 지난 2년
여동안 국내 LG전자와 퓨처텔이란 벤처기업과 관계를 맺어왔다.
중흥통신은 특히 퓨처텔에 자본 참여까지 했다. 이름도 ZTE퓨처텔로 바꿨
다. 한국 CDMA 기술을 이전받기 위한 '안테나 기업'을 설립했다고 볼 수 있
다. ZTE퓨처텔은 특히 ETRI 출신들로 구성된 기술집단이다.
국책 연구기관에서 국가적으로 중요한 사업을 담당했던 핵심 인물들이 벤처
기업을 설립하고 중국의 '기술 안테나 기업'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업계 한 전문가는 "당장 미끼에 달린 떡밥을 따먹기 위해 낚시바늘을 덥석
무는 기업이 많이 있다"며 "이같은 행위는 자신은 물론 국내 산업을 중국
의 속국으로 만드는 '매국의 길'"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특히 "그렇게 라
도 하지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국내 현실이 안타깝다"고 걱정했다.
그러나 기술인력의 자성만으로 중국의 위협을 벗어날 수는 없다.
우리 정부와 기업이 아무리 '전략적'으로 '기술 이전'을 제한한다 해도 미
국 퀄컴과 '죽이 맞은' 중국의 경우 급속히 기술을 획득할 게 뻔하기 때문
이다. 따라서 지금은 근본적인 대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에 대해 업계 전문가가 제시하는 대안은 크게 두 가지다.
첫번째는 역설적이긴 하지만 적극적인 중국 현지화 전략이다. 그렇지 않고
는 중국 땅에 발을 디딜 방법이 현실적으로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략은 기술 장벽이 그리 높지 않은 분야로 엄격히 제한돼야 한
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인건비 등 생산원가를 낮추는 게 경쟁의 핵
심인 세트 산업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근본적인 방법은 기술력에서 중국보다 1~2년 앞서갈 수 있는 품목을 지
속적으로 발굴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중국과 끊임없이 기술격차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는 뜻이다. 통신 분야의 경우 원자재나 부품 자
본재 같은 분야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미국 퀄컴처럼 원천기술을 확보하지 못한 우리 나라의 경우 이같은
경쟁우위 품목을 발굴하기가 여간해서는 쉽지않다는 점이다.
여하튼, 대통령 국무총리 장관까지 나서서 성사시키고 있는 현재의 통신 분
야 대중국 수출이 '떡밥을 따먹자고 낚시바늘을 문 게 아닌지' 심각하게 따
져 볼 때라는 게 뜻있는 전문가들의 일치된 지적이다.
/이균성기자 gslee@inews24.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