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월드컵 대표팀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2007년 7월 핌 베어벡 감독이 자진 사퇴하면서 대표팀은 삐그덕거렸고, 새로운 사령탑을 두고 고민하던 대한축구협회는 허정무 당시 전남 드래곤즈 감독을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했다.
허 감독은 축구인으로서 인생의 모든 것을 걸겠다라며 월드컵 올인을 선언했다. 본선으로 향하는 길은 시작이 나쁘지 않았지만 내용은 불만족이었다. 3승3무, 무패로 3차 예선을 통과했지만 골 결정력 부족과 수비 불안이라는 한국 축구의 영원한 숙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허정무 감독의 이름에 빗대 '허무 축구'라는 말까지 쏟아졌다.
특히 수비가 잘 되지 않은 상황에서 당시 2007 아시안컵 음주 파문으로 1년 대표팀 자격 정지 징계를 받았던 골키퍼 이운재의 조기 사면을 시도하며 여론의 역풍을 맞기도 했다.
최종예선은 더욱 고달펐다. 북한, 사우디아라비아, 이란, 아랍에미리트연합(UAE)과 죽음의 조에 편성됐다. 북한이 같은 조에 낀 것도 껄꺼러웠다. 그래도 2008년 11월 사우디와의 3차전 원정에서 이근호, 박주영의 연속골로 2-0으로 이겼고 2009년 2월 이란 테헤란에서 열린 이란과의 4차전에서 박지성의 동점골로 1-1로 비기면서 고비를 넘었다. 이후 북한, UAE를 차례로 이기며 본선 진출을 확정했다.
본선에서는 그리스,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와 같은 조에 속했다. 한국은 남아공 입성 직전 오스트리아 노이슈티프트에 1차 베이스캠프를 차려놓고 고지대 적응 훈련을 하며 벨라루스, 스페인과 평가전을 치렀다. 이 과정에서 곽태휘가 불의의 부상을 당해 최종엔트리에서 탈락한 선수들과 귀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불운을 맛봤다.
당시 미디어 담당관 자격으로 탈락한 선수들을 위로해줬던 이원재 현 월드컵기념관장은 정말 서로 말을 제대로 못할 정도로 안타까웠다. 그래서 남은 인원들이 탈락자들을 위해 더 잘하자고 뭉쳤던 것 같다라고 회상했다.
남아공에 입성한 허정무 감독과 선수들은 포트엘리자베스 넬슨 만델라베이에서 열린 그리스와의 첫 경기를 반드시 잡겠다는 각오로 나섰다. 이미 스위스에서 그리스-파라과이의 평가전을 직접 확인했던 터라 대비책도 충분히 세워놓았다. 상대 수비진의 느린 스피드를 간파하고 속도전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운좋게도 전반 7분 기성용이 왼쪽 측면에서 연결한 프리킥을 이정수가 선제골로 연결했다. 주도권을 잡은 한국은 그리스의 약점을 쉼없이 찔렀고 후반 7분 박지성이 수비수의 볼 트래핑 실수를 놓치지 않고 가로채 드리블한 뒤 골문으로 파고들어 추가골로 연결했다. 박지성의 월드컵 세 대회 연속 득점이 터지는 순간이었다. 한국은 기분 좋은 첫 승리를 거두며 짓눌렀던 월드컵의 부담을 상당히 덜었다.
하지만, 아르헨티나와의 2차전은 달랐다. 리오넬 메시에 현혹됐다가 곤살로 이과인, 카를로스 테베스 등의 움직임을 놓쳤다. 이과인은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한국을 무너뜨렸다. 한국은 이청용이 전반 종료 직전 만회골을 넣으며 1-2를 만들었지만 후반에 수비진이 무너지며 1-4로 완패했다.
모든 면에서 아르헨티나의 노련함에 당했다. 당시 아르헨티나전을 최근 발간한 자서전에 담은 허정무 부회장은 디에고 마라도나 감독을 언급하며 당시 모두가 나와 마라도나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마라도나는 주심에게 강하게 항의하는 등 영리했다며 아르헨티나 사령탑 마라도나와의 기싸움에서 밀린 것을 아쉬워했다.
운명의 나이지리아와 3차전, 한국은 박주영을 최전방에 내세우며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전반 12분 칼루 우체에게 선제골을 내줬지만 38분 이정수가 또 다시 그리스전과 마찬가지로 기성용의 도움을 받아 이른바 '헤발슛(머리와 발을 동시에 내밀어 슈팅)'으로 동점골에 성공했다.
후반 4분, 박주영이 미드필드 왼쪽에서 시도한 프리킥이 그대로 나이지리아 골망을 갈랐다. 승운이 따르는 듯하자 허 감독은 후반 19분 염기훈을 빼고 김남일을 투입했다. 하지만, 김남일은 23분 페널티지역 안에서 파울을 하며 페널티킥을 허용했고 야쿠부 아예그베니가 성공시켰다.
이제 남은 것은 한 골 싸움이었다. 한국은 지키면서 골을 노렸지만 쉽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박지성과 이영표가 노련하게 경기를 이끌면서 무승부로 끝내 사상 첫 원정 월드컵 16강을 달성했다.
16강 상대는 우루과이였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한국은 루이스 수아레스에게 실점하며 끌려갔다. 그래도 정신을 차린 한국은 후반 23분 이청용이 머리로 동점골을 밀어 넣었다. 한 골만 더 넣으면 8강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후반 35분 다시 한 번 수아레스에게 실점했다. 한국은 40분 박지성의 절묘한 패스를 받은 이동국이 슈팅했지만 물에 젖은 그라운드와 마찰을 일으키며 굴러갔고 동점골에 실패했다. 결국, 8강 티켓은 우루과이에게 갔고 내리는 비를 맞으며 태극전사들은 모두가 울었다.
8강은 좌절됐지만 한국은 원정 월드컵에 대한 자신감을 안고 돌아올 수 있었다. 특히 기성용, 이청용, 정성룡 등 젊은피들이 성장하며 성공적인 세대교체를 이뤄냈다. 국내 감독으로도 세계 무대에서 충분히 성적을 낼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세대교체의 중심에 섰던 선수들은 2014 브라질월드컵의 중심으로 떠오르며 새로운 세상이 왔음을 알렸다. 덕분에 큰 수고를 했던 박지성과 이영표는 마음놓고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할 수 있었다.
이성필기자 elephant14@joynews24.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