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권]IT개발자, '제2의 전태일' 될라


'고등학교시절 전국컴퓨터경진대회에서 2등을 했지만 이과 대신 문과를 갔습니다. 그 이유를 이 글이 모두 설명해주는군요.'

'컴퓨터공학과를 올해 2월 졸업한 학생입니다. 국비 지원까지 받아 외국 가서 IT기술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과감히 개발자의 길을 포기했습니다. 정말 이 나라에서는 개발자에게 미래가 없습니다. 개발자의 길을 포기한 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합니다.'

'IT 공부하는 학생입니다. 이번에 졸업인데, 이 글 보니까 걱정 많이 됩니다. 공무원 준비나 할까...'

'정말 힘든 건 애들이 전화해서 거의 울다시피 하면서 '아빠 보고 싶어, 언제 와' 할 때입니다. 이러면 정말 일할 맛 안 납니다.'

지난 10일 다음의 '블로그뉴스'에 오른 글 한 편이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제목은 'IT맨, 내가 사직서를 쓴 이유'(http://blog.daum.net/moveon21/5423451).

이 글에는 요즘 흔해 빠진 사진이나 동영상 하나 붙어 있지 않다. 분량도 A4 용지로 6장이나 된다. 글에 '양념'도 없고 장황해서 재미없는 축에 든다. 끝까지 다 읽으려면 작심해야 한다. 그런 글을 무려 9만9천672명이 읽었다. 댓글도 621개가 달렸다. 11일에는 아이디 '푸른바다'가 이 글을 퍼다가 다음 아고라의 '네티즌 청원'에 띄웠다. '노동부 건의'를 겨냥한 이 청원에는 현재 1천878여명이 서명했다. 목표는 1만명.

이 글은 누가 쓴 글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내용에 진실성이 엿보인다. 621개의 댓글 중, 그 흔한 '안티성 댓글'이 거의 없다. 희한할 정도다. 압도적으로 많은 댓글이 공감, 또 다른 문제 제기, 원인 분석, 대안을 말한다. 이 글과 댓글들이 교감하는 분위기 또한 매우 엄숙하고 진지하다.

이 정도면, 이 글은 한 개인의 사사로운 넋두리를 넘어섰다. 공적 가치를 얻고, 보편적인 공감대를 가졌다는 뜻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 글로 하여금 그 같은 울림을 갖게 했을까.

이 글을 쓴 사람은 프로그래밍 언어 C/C++를 다루는 이른바 'IT개발자'다. 그는 20대 초반이던 2000년 7월 프로그래머로 취업했다. 그런데 그는 '이 땅에서 다시는 개발자 일을 안 한다'고 결심하고 지난 5월 사직서를 던졌다. 사직의 이유는 '살인적인 노동환경' 때문이란다.

그는 입사 초기엔 직장에서 날밤 새면서 프로그램을 짜도 그러려니 했다. 오히려 멋있어 보였다. 철야 작업을 '진정한 프로그래머의 세계'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IT개발자로서 만 7년을 지낸 뒤 그가 다시 정의내린 프로그래머의 세계는 '탈출하고 싶은 지옥'으로 바뀌었다. 정상 근무일, 오전 9시~오후 6시 근무 기준으로 두 달 걸릴 프로젝트는 항상 한 달로 뚝 줄어서 일이 떨어진다. 인력도 필요 분의 절반 밖에 배정되지 않는다. 이 '반토막의 법칙'은 그가 직장을 옮겨도 어디나 다 똑같았다.

그 결과는? 기계도 감당하기 힘든 야근, 철야의 연속이다. 시간과 인력을 절반 밖에 주지 않고 프로젝트를 끝내라고 하면, 방법은 달리 없다. 토·일요일도 반납하고 야근·철야하는 수 밖에. 사규에는 '회사가 주말 출근과 야근을 요구할 때 직원은 흔쾌히 동의한다'는 규정까지 있다. 야근 수당, 주말 출근 수당조차 그는 여태 받아보지 못했다.

IT개발자 세계의 비정함도 그는 여러 차례 맛봤다. 한 달 내내 출근했는데, 추석에도 출근하래서 안 나간 적이 있다. 그랬더니 원청 업체 담당자가 그의 회사 사장에게 시말서를 쓰라고 했단다. 프로젝트를 제때 끝내고 6시 '칼퇴근'을 몇 번 했더니 연봉협상 때 사장이 "그땐 별로 힘들게 일 안 했잖아"라는 소리를 했다. 일하면서 알러지성 폐질환을 얻었지만 '쟤는 왜 저리 빌빌대냐'는 수근거림을 들어야 했다. 그가 내린 결론은 'IT개발자는 싸게 사용하고 버리면 되는 도구'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받은 8년차 연봉은 4천만원 가까이. 퇴사 전 꽤 괜찮은 회사에서 연봉 4천500만원을 제시받았다. 하지만 그는 거절했다. 아침 9시 출근해서 밤 12시 퇴근하고, 한 달에 이틀 쉬는데 그마저 건너뛰기 일쑤고, 국경일 모두 출근하고 설날도 하루만 쉬는 회사였다. '거기가 거기'인 셈이었다.

이런 관행과 문화가 IT개발자의 세계에 구조화돼 있는 것에 그는 절망했다. 그는 7년을 견뎠지만, 앞으로도 그런 관행이 개선될 전망을 발견하지 못했다. 끝내 사직서를 던졌다.

그가 쓴 'IT맨, 내가 사직서를 쓴 이유'에 나타난 IT개발자의 처지는 사실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15년, 20년 된 개발자들도 댓글에서 '예나 지금이나 바뀐 게 없다'고 하는 걸 보면 정말 해묵은 문제다. 언론도 이따금 IT개발자의 열악한 근무환경을 조명하며 이슈화한 바 있다. IT개발자들의 세계 내부에서도 비판적 문제제기가 수도 없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지나도 본질적으로 개선된 것은 없다.

분신노동자 전태일은 17살이던 1965년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전태일은 자신도 그랬지만, 열두어 살의 어린 소녀들이 점심을 굶어가며 먼지 구덩이 다락방 작업장에서 온종일 햇빛도 못 보고 쏟아지는 졸음을 막기 위해 타이밍 약을 먹고, 뾰족한 바늘로 제살을 찌르며 일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하루 14~16시간을 일하고 일당으로 고작 70~80원(당시 다방의 커피 한잔에 50원)을 받는 열악하기 짝이 없는 조건이었다.

요즘 IT개발자가 일하는 현실은 컴퓨터가 있는 풍경을 빼면, 전태일 시절의 평화시장과 많은 점이 흡사해 보인다. IT개발자들은 기본적인 권리도 보장받지 못하고 있고, 건강을 해치고 병을 얻을 정도로 고된 작업시간에 지칠 대로 지쳐 있다.

IT개발자들이 반드시 이렇듯 열악한 조건에서 일해야 할 이유는 없다. IT개발업무의 특수성을 들먹이며 어쩔 수 없다는 현실론을 내세우는 축도 있다. 하지만 그리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선진국은 물론이고 개도국에서도 IT개발자를 휴일 없이 출근시키고, 잠을 3~4시간만 재우는 나라는 없다. 외국에서 IT개발자는 다른 직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 IT개발자의 세계는 60, 70년대식 '평화시장 여공' 부려먹듯 하는 관성이 오늘에도 되풀이되는 것일 뿐이다.

정말 걱정스러운 것은, 지금 우리 IT개발자들에게 '전직, 탈출만이 살길'이라는 심리가 갈수록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엔 체념하고 고된 현실에 적응하며 살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결혼한 IT개발자는 가정파탄의 '실제적 위협'에 직면해 있고, 맞선 본 총각 IT개발자는 자신이 프로그래머임을 밝히는 순간 얼굴이 굳어지는 처녀를 보게 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IT개발자들은 자신의 직업을 계속할 이유와 의미를 찾기가 갈수록 힘들어진다.

때문에 직업을 아예 IT와 무관한 쪽으로 바꾸는 사람들이 속출한다. 외국어를 열심히 배워서 IT이민을 간 사람들은 성공담을 들려주며 '한국을 떠나라'고 권유한다. 그 통에 실제로 이민 가는 IT개발자들이 크게 늘었다. 요즘 IT개발자 구하기 힘들어진 이유다.

어디 그 뿐인가. IT개발자의 길을 걷겠다는 새싹들에게는 주변에서 만류 일색이다. 컴퓨터공학과, 전산학과는 가장 인기 없는 과가 된지 오래다. 신입 개발자 10명중 8명은 취업 후 1~2년만에 그만둔다는 얘기도 널리 퍼져 있다. 있는 사람은 속속 떠나고, 신규 유입은 없는 분야가 IT개발자의 세계로 변해가고 있다.

IT개발자들은 '프로그래머, 신이 내린 마지막 노가다'라고 자조하고 있다.

IT개발자는 IT생태계에서 뺄래야 뺄 수 없는 중요한 축이다. 온갖 IT시스템, IT서비스를 실제로 구현하는 것을 IT개발자들이 떠맡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IT개발자들이 절망해서 앞다퉈 전직, 탈출할 경우 장차 한국의 IT생태계는 심각한 공백상태를 맞을 수도 있다. IT개발자의 문제는 IT한국의 미래에도 심각한 그늘을 드리운다.

IT개발자들의 세계가 이렇게 무너져 가는 것을 과연 언제까지 방치해야 할까? 인도 등지에서 데려와 메우면 된다고? 이제는 인도 개발자들도 사정을 알고, 한국을 기피대상으로 여긴다고 한다. 이걸 떠나서, 외국인력을 대안으로 보는 시각 자체가 바람직하지 않다. 세계적 수준의 IT개발인력을 육성하고 그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을 만들도록 문제를 해결하는 게 옳다. 우수한 국내 인력을 절망케 하여 내쫓고, 빈 자리를 외국인력으로 메운다는 것은 국력의 기회손실을 낳는 꼴이다.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노동부·정통부 등 관계부처가 나서서 손 쓸 필요가 있다. IT프로젝트가 이뤄지는 발주기업-원청기업-하청기업에서 벌어지는 불공정한 사례는 없는지, 하청기업 종사자들의 근로조건이 법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않은지 점검하고 개선조치를 취해야 한다.

IT기업들 역시 지금처럼 우수인력을 내쫓는 '착취적' IT프로젝트의 구조와 관행을 과감하게 뜯어고치는 쪽으로 발상을 전환해야 한다. 전국 수십만의 IT개발자들이 지금도 속으로 '악덕 기업'을 성토하고 있음을 귀 열고 들어야 한다. 한 개발자는 냉소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한국이 좋은 점이라면 외국에서는 한국처럼 경력 쌓기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일할 기회가 전혀 없으니까요. 그러니, 노예처럼 구르더라도 자기 분야에서 실력 닦으세요. 한국서 3년 구르면 고급기술자 됩니다. 외국에서 충분히 인정받죠. 영어나 틈틈이 공부해 두시고, 적당한 시기에 이민가세요. 선진국에서 프로그래머는 해볼 만한 직업입니다. 기업들이 문제에요. 인력을 장기적으로 쓸 생각 안하고 몸 망가지더라도 당장 혹사시켜 써먹고 뒷일은 신경 안 쓰는 한국기업 정말 나쁩니다. 다 나오세요. 기업들 정신차리게.'

/이재권 논설실장 jaylee@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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