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손 묶인 송기창의 ‘서시’·정혜욱의 ‘수선화’ 뭉클…'가곡다방’ 한국가곡 패러다임 바꿨다

작가 연경진·작곡가 나실인 '가곡 20곡으로 만든 음악극' 온라인 히트


[아이뉴스24 민병무 기자] 천장 위에서 커다란 밧줄 3개가 내려왔다. 섬뜩하다. 내일이 보이지 않는 혹독한 일제 강점기. 온통 검은빛만 가득한 시대다. ‘절친’ 사이인 인승, 예순, 영수는 징병·징용을 독려하는 노래를 만들라는 지시를 거부해 투옥된다. 세 사람 모두 허공에 손이 묶여 옴짝달싹 못한다. 매서운 삭풍에 모든 것이 얼어붙은 시절이다.

일본 앞잡이는 악독한 고문을 하며 괴롭힌다. 천황폐하 만세 노래와 황국신민 찬양가를 만들면 엄청난 부를 누리게 해주겠다며 회유를 한다. 그러나 작곡가 겸 성악가인 인승(바리톤 송기창 분)은 무릎 꿇지 않는다. 오히려 더 당당하게 자신의 마음을 담아 ‘서시(윤동주 시·나실인 곡)’를 부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뭉클하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고난의 시대를 피하지 않고 떳떳하게 맞서 살아가겠다는 굳은 다짐이 읽혀진다.

국립박물관 문화재단은 한국가곡 탄생 100주년을 맞아 26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극장용에서 음악극 ‘이야기가 흐르는 가곡다방’을 온라인 공연으로 선보였다.

사탕발림이 통하지 않자 이번엔 인승의 연인인 예순(소프라노 정혜욱 분)에게 협박이 쏟아진다. 하지만 그 역시 굴복하지 않는다. “그대는 차디찬 / 의지의 날개로 / 끝없는 고독의 위를 / 날으는 애달픈 마음 / 또한 그리고 그리다가 / 죽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 / 또다시 죽는 가여운 넋은 / 가여운 넋은 아닐까” 시인인 예순은 ‘수선화(김동명 시·김동진 곡)’를 부르며 자신의 결연한 뜻을 더욱 다진다. ‘서시’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간 중간 흘러나오는 해금소리가 마냥 슬프지만은 않다. 오히려 가슴을 후벼 파는 쨍쨍한 소리는 강철처럼 더 단단해지는 주인공들의 마음을 닮았다.

그러나 모두가 뜻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소신을 지키는 시대는 아니었다. 변절한 사람도 있다. 인승의 친구인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영수(테너 이재욱)는 겁에 질려 일제에 협조한다. 일제를 찬양하는 노래를 만든다. 그리고 세상의 비난이 두려워 친구에게 변절자 누명을 씌우는 ‘꼼수’를 쓰는데…

국립박물관 문화재단은 한국가곡 탄생 100주년을 맞아 26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극장용에서 음악극 ‘이야기가 흐르는 가곡다방’을 온라인 공연으로 선보였다.

우리 가곡에 남다른 애정을 가진 소프라노 정선화·정혜욱·이아연, 테너 이현·이재욱, 바리톤 송기창, 배우 류창우·이현주가 한국가곡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귀로만 듣는 것에서 벗어나 눈으로도 보는 참신한 도전을 시도했다. 일제강점기와 6·25한국전쟁 시기를 거쳐 60~70년대까지 널리 불려진 노래와 새로 만든 창작노래 등 한국가곡 20곡으로 음악극을 꾸며 감동을 선사했다.

26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극장용에서 선보인 ‘이야기가 흐르는 가곡다방’은 한국가곡 탄생 100주년을 맞아 기획한 공연이다. 원래 지난 4월에 열릴 예정이었으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두 달 가량 연기돼 6월에 올리게 됐다. 하지만 팬데믹이 다시 극성을 부려 대면공연이 취소되고 한번의 온라인 생중계로 대체됐다. 몇 달 동안 공들여 준비한 출연자와 스태프 모두 실망이 컸지만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네이버TV와 V-classic 채널을 통해 2000여명 넘게 감상했다.

국립박물관 문화재단은 한국가곡 탄생 100주년을 맞아 26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극장용에서 음악극 ‘이야기가 흐르는 가곡다방’을 온라인 공연으로 선보였다.

하나의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를 담은 액자식 구성(額子式 構成)으로 이루어진 공연이다. 극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아트컴퍼니 길’ 연경진 대표의 솜씨가 돋보인다. 가곡의 시어를 스토리 속 인물들의 이야기에 절묘하게 녹였다. 거기에 작곡과 편곡을 맡은 나실인의 역량까지 합해져 멋진 작품이 됐다. 피아노(이미나)와 어쿠스틱 기타(천상혁), 그리고 가야금(이가빈)과 해금(양희진)을 활용한 현대적인 편곡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가곡 선율에 신선함을 더했다.

무대가 열리자 한때 젊은 음악가들과 시인들이 활발하게 교류하며 만남의 장소로 북적대던 다방이 나온다. 낡은 LP판 지지직 소리 내는 턴테이블이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흰색 천에 ‘가곡다방’이라고 새겨진 커버를 씌운 의자에 몇몇 손님이 앉아있다.

먼저 ‘봉선화(김형준 시·홍난파)’가 구슬프게 흘렀다. 처음에 ‘애수(哀愁)’라는 바이올린 기악곡으로 만들었고(1920년), 나중에 노랫말을 붙인(1925년) 어정쩡한 출생 탓에 이 곡을 우리 가곡의 효시로 보지 않는 의견이 있다. 오히려 1922년 이은상의 시에 박태준이 선율을 단 ‘동무생각’을 최초의 한국가곡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는 홍난파의 친일행적까지 덧붙여져 한국가곡의 시초를 두고 갑론을박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상황을 두루 감안해 노래는 부르지 않고 연주곡으로 선사했다.

국립박물관 문화재단은 한국가곡 탄생 100주년을 맞아 26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극장용에서 음악극 ‘이야기가 흐르는 가곡다방’을 온라인 공연으로 선보였다.

‘가곡다방’은 거의 매일 파리만 날리는 썰렁한 곳으로 전락했다. 손님이 없으니 음악을 고르고 틀어주는 DJ 역할도 다방주인(테너 이현 분)의 몫이 됐다. 어느날 나이 든 여자 손님(소프라노 정선화 분)이 들어왔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주인은 예전에 자주 왔던 어떤 손님의 사연이라며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다방주인이 내레이션 역할을 하며 1940년대 초반의 어느날로 안내를 한다.

악랄한 일제의 만행이 극에 달하던 시대. 인승과 예순은 인승의 친구인 영수의 소개로 한 음악회에서 만난다. 두 사람은 음악적 교류를 하며 가까워진다. 서로에게 애틋한 감정도 생긴다. 그러던 중 일제가 예술가 대부분을 체포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어진 역사의 거친 변화만큼이나 이들의 운명도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데…

'이야기가 흐르는 가곡다방'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스토리가 있는 음악극의 매력을 선사한다. 극의 흐름에 딱맞게 적재적소에 한국가곡이 나온다.

출연자 모두가 '그리운 강남(김석송 시·안기영 곡)‘을 합창한 뒤, '그네(김말봉 시·금수현 곡)’ ‘오빠생각(최순애 시·박태준 곡)’ ‘가고파(이은상 시·김동진 곡)’ ‘고풍의상(조지훈 시·윤이상 곡)’ ‘동무생각(이은상 시·박태준 곡)’뿐만 아니라 ‘엄마야 누나야(김소월 시·이영조 곡)’ ‘고향(정지용 시·채동선 곡)’ ‘꽃구름 속에(박두진 곡·이흥렬 곡)’ ‘명태(양명문 시·변훈 곡)’를 잇따라 부르며 분위기를 돋운다.

이어 커다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 삶의 파편을 담고 있는 ‘떠나가는 배(양중해 시·변훈 곡)’ ‘비단안개(김소월 시·이영조 곡)’ ‘접동새(김소월 시·나운영 곡)’ ‘사월의 노래(박목월 시·김순애 곡)’ ‘남으로 창을 내겠소(김상용 시·백병동 곡)’ ‘산유화(김소월 시·김순남 곡)’ 등이 파노라마처럼 이어진다. 피날레는 이번 공연을 위해 특별히 만든 ‘아리랑(연경진 시·나실인 곡)’ 합창으로 마무리했다.

공연을 마친 뒤 6명의 성악가들은 "오글오글 발연기를 선보여 너무 쑥스럽다"고 말했지만, 온라인 공연을 본 사람들은 "기대 이상의 연기력에 감탄했다"며 찬사를 보냈다. 한 성악가는 대상포진이 왔음에도 진통제 투혼을 발휘하기도 했다. 모두들 공연 전날까지 엄청난 대사를 외우느라 진땀을 뺐지만 퍼펙트 공연을 선보여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번 공연을 기획하고 제작한 국립박물관문화재단의 홍성운 사무국장은 “격동의 근현대 100년의 역사·문학적 배경 하에 성장해 온 한국가곡의 참 가치를 알리고 싶었다”라며 “아름다운 시와 선율이 함께하는 가곡을 젊은이들도 즐기는 계기가 됐으며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코로나 상황이 잠잠해지면 다시 무대에 올려 현장에서 직접 공연을 관람하는 시간을 마련하겠다”고 덧붙였다.

민병무기자 min66@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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