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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신 ‘그 소녀의 이야기' 현악사중주로 한번, 오페라로 또한번 울렸다


작곡발표회 '눈물 왈칵'…황윤미·이정은·엄성화·박정민·김순기·콰르텟수 출연

[아이뉴스24 민병무 기자] #1. 먼저 ‘콰르텟수(Quartet秀)’가 나왔다. 여근하(바이올린)·김주은(바이올린)·임경민(비올라)·박한나(첼로)로 이루어진 앙상블이다. 이재신 작곡가의 현악사중주 ‘그 소녀의 이야기’를 연주하자 콘서트장은 금세 숙연해졌다. 굳이 위안부 할머니를 기리는 곡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가슴이 먼저 반응한다. 10년 넘게 환상케미를 이루며 공연을 하고 있지만, 이 곡을 대할 때면 늘 네 사람의 목이 멘다. 천년 흘러도 잊을 수 없는 아픔이 16줄에 매달려 흐르니, 듣는 관객은 오죽할까. 이어진 ‘검은 바다’에서도 아물지 않는 상처를 어루만지는 현의 위로가 뭉클하다.

'콰르텟수'가 작곡가 이재신 작곡발표회에서 현악사중주 '그 소녀의 이야기'를 연주하고 있다.
'콰르텟수'가 작곡가 이재신 작곡발표회에서 현악사중주 '그 소녀의 이야기'를 연주하고 있다.

#2. 현악사중주 ‘그 소녀의 이야기’에서 모티브를 확장시켜, 이재신은 똑같은 이름의 오페라 ‘그 소녀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대본까지 직접 썼다. 이른바 ‘원소스 멀티유즈(One-Source Multi-Use)’다. 소프라노 황윤미가 낯선 이국땅으로 돈 벌러 떠나는 열여섯 살 소녀의 설레는 마음을 담아 ‘내 이름은 이영자’를 불렀다. 상해는 날도 맑고 공기도 좋다며 꿈에 부풀어 부르는 아리아다. 곧 닥칠 불행을 예상하지 못하고 천진난만하게 부르니 더 애처롭다. 이어진 노래 ‘내가 사람을 죽였어’에서는 결국 울컥한다. 영자는 점례를 보호하기 위해 일본군 장교를 칼로 찔러 죽인다. 하얀 치마에 빨간 피가 흥건히 묻은 채 “내가 사람을 죽였어. 아니야,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 그래, 난 짐승을 죽인거야”라며 절규한다. 첫사랑 남자와 고향의 부모를 그리워하며 토해내는 노래는 도니제티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 나오는 매드신 못지않다.

소프라노 황윤미가 작곡가 이재신 작곡발표회에서 김순기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오페라 '그 소녀의 이야기'에 나오는 아리아 '내가 사람을 죽였어'를 부르고 있다.
소프라노 황윤미가 작곡가 이재신 작곡발표회에서 김순기의 피아노 반주에 맞춰 오페라 '그 소녀의 이야기'에 나오는 아리아 '내가 사람을 죽였어'를 부르고 있다.

감동을 선사하는 데는 엄청난 무대와 세트가 필요 없었다. 어차피 진심은 통하는 법. 작곡가 이재신이 신작 가곡과 오페라를 공개하는 작곡발표회를 13일(토) 오후 5시 서울 압구정로 국제아트홀에서 열었다. 원래 4월에 개최할 예정이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때문에 6월로 미뤄진 끝에 열린 공연이다.

현악사중주와 오페라로 선보인 ‘그 소녀의 이야기’는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오페라는 미국 땅에 세 번째로 세워진 애틀랜타 평화의 소녀상 건립 2주년을 기념해 만들었으며, 지난해 6월 미국에서 먼저 초연됐고 이번에 한국에서 처음 공개된 것. 위안부로 팔려간 두 소녀 영자와 점례를 중심으로 슬픈 역사에 대한 위로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표현했다.

작곡발표회를 마친뒤 작곡가 이재신, 피아니스트 김순기, 소프라노 황윤미, 소프라노 이정은, 바이올리니스트 여근하, 첼리스트 박한나, 바이올리니스트 김주은, 비올라니스트 임경민, 바리톤 박정민(왼쪽부터)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작곡발표회를 마친뒤 작곡가 이재신, 피아니스트 김순기, 소프라노 황윤미, 소프라노 이정은, 바이올리니스트 여근하, 첼리스트 박한나, 바이올리니스트 김주은, 비올라니스트 임경민, 바리톤 박정민(왼쪽부터)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케르베로스(Kerberos)는 저승세계의 입구를 지키는 머리 세 개 달린 개다. 지금처럼 세상에 대형 참사와 질병으로 죽는 사람이 넘치는 이유는 바로 죽음의 문을 지켜야 할 케르베로스가 임무를 소홀히 해 문을 열어버렸기 때문이라는 착상에서 시작된다.

남편을 잃은 부인 ‘영(소프라노 이정은 분)’이 죽은 남편 ‘혼(바리톤 박정민 분)’과 부르는 이중창 ‘나를 보는 눈’은 애절했다. “나를 보는 눈 처량하여라~ 나를 보는 눈 애처로워라” 남편이 원래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면 금세 눈치챘을 텐데 개의 모습을 하고 있어 부인은 알아보지 못한다. 바로 앞에 남편 ‘혼’이 있는데 보고 싶다며 애틋한 그리움만 쏟아낸다. 또한 ‘영(이정은 분)’과 ‘카론(황윤미 분)’이 부르는 이중창 ‘내가 왔어’ 후반부는 들리브의 '라크메'에 나오는 ‘꽃의 이중창’이 연상될 만큼 원더풀 하모니를 이뤘다.

‘1953’의 배경은 6·25한국전쟁이 휴전 분위기로 무르익어가는 1953년이다. 국군 김선남 대위는 수용소 포로들을 모아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연극으로 올리라는 명령을 받는다. 연극을 활용해 반공포로를 교화시키려는 정치적 목적이 깔려있는 지시였다. 빨갱이라면 치를 떠는 김 대위는 어쩔 수 없이 연출을 맡게 돼 글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포로들과 씨름한다. 그 과정에서 여자포로 오영실(이정은 분)과 ‘썸’을 타기도 한다. 오영실이 고향의 부모를 그리워하며 부르는 아리아 ‘아, 꿈이라면’은 절절했다.

이정은은 뮤지컬 ‘145년만의 위로(대본 박하민)’에 나오는 ‘내 가슴에 별빛’도 멋지게 소화했다. 프랑스군이 병인양요 때 약탈한 강화도 외규장각 도서와 이를 되찾기 위해 일생을 바친 서지학가 박병선 박사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박병선 박사로 변신한 이정은이 아름다운 멜로디를 타고 애잔한 향수를 펼쳐냈다.

이재신은 앞으로 ‘서울의 작곡가’라는 별명을 얻을 것 같다. 이날 가곡을 5곡 선보였는데, 그중 4곡이 서울과 관련이 있다. 테너 엄성화는 ‘꽃사슴 뛰노는 청와대(오희정 시)’와 ‘한강(이재신 시)’을, 이정은은 ‘명동성당에서(하옥이 시)’를, 그리고 박정민은 ‘바람위의 여의도(박하민 시)’를 불렀다. 박정민은 작자미상의 사설시조에 곡을 붙인 ‘개를 여라믄이나 기르되’를 해학적으로 풀어내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번 공연의 모든 반주를 맡은 피아니스트 김순기는 성악가들과 아름다운 합을 이루기도 했지만, 연주 중간중간에 곡에 대한 친절 해설까지 곁들여 1인2역의 중책을 멋지게 완수했다.

작곡가 겸 평론가 성용원은 “이재신 작곡가의 음악적 이상과 고뇌, 목표 그리고 작가정신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리였다”라며 “이렇게 훌륭한 오페라 작품이 계속 무대에 오르며 롱런하지 못하는 한국음악계의 현실이 안타깝다”며 아쉬워했다.

이재신은 독일 바이마르 프란츠 리스트 국립음대를 졸업했다. 오페라 ‘케르베로스 이야기’ ‘1953’ ‘그 소녀의 이야기’, 뮤지컬 ‘이클립스’ ‘145년만의 위로’, 그리고 영화 ‘마지막 밥상’ ‘허수아비들의 땅’ ‘검은 갈매기’ ‘블랙스톤’ ‘이미지 콘체르토’ 등의 주제곡을 포함해 다수의 작품을 작곡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재신의 영화음악론’에 이어 올해에는 그의 두 번째 저서 ‘가곡과 오페라 작곡론’이 출간됐다.

민병무 기자 min66@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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