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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금융소비자보호법 내팽개친 '금배지의 직무유기'


[아이뉴스24 서상혁 기자] 중국 한나라 시대 이야기다. 정치가였던 육가는 황제 앞에서 말을 할 때마다 춘추 시대 민요를 엮어 만든 시집인 '시경'과 산문집이었던 '상서‘를 인용하곤 했다. 어느 날 이런 육가의 말에 화가 난 황제는 "나는 말 등에 올라타 천하를 얻었다. 어찌 시경과 상서 따위를 쓰겠는가"라고 꾸짖었다.

그러자 육가는 "말 등에 올라타서 천하를 얻었다 하여 어찌 말 등에 올라타고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은나라의 탕왕과 주나라의 무왕은 힘으로 정권을 얻었지만, 민심에 순응해 나라를 지켰습니다"라고 말했다.

 [사진=조성우 기자]
[사진=조성우 기자]

정치란 무엇이며, 정치의 역할은 무엇이고, 또 정치의 목적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정치인은 어떤 신념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선 무수히 많은 의견이 있을 것 같다. 평생을 공부해도 정답을 찾긴 어려울 테다.

그래도 '정치인은 시민사회와 동떨어질 수 없다'라는 말에 대해선 대부분 공감할 수 있다. '말을 타고 천하를 얻었다 하여 말 등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라는 2천년도 더 된 말이 아직도 사람들에게 깊은 깨달음을 주는 것만 봐도 그렇다.

'금융소비자보호법안'이 국회에서 잠자고 있다. 지난 해 가까스로 정무위원회를 넘었지만 사실상 마지막 관문인 법제사법위원회를 넘지 못하고 있다.

금융소비자법안은 금융소비자의 상황을 고려해 상품을 추천해야 하고, 상품 판매 시 중요사항을 설명하는 한편, 소비자가 상품에 대해 오인할 수 있는 행위를 금하는 '6대 판매 규제'를 모든 금융상품에 적용하는 게 줄기다. 이를 어겼을 시, 금융회사에 징벌적 과징금과 과태료를 부과할 수 있는 근거도 마련됐다.

금융소비자의 방어권도 담겼다. 계약 후 일정 기간 내 청약을 가능하게 하는 '청약철회권', 판매자의 설명의무 위반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 시 판매자가 위법행위를 입증해야 하는 '손해배상 입증책임 전환' 등이다.

지난 10년 동안 금융소비자 보호 법안은 여타 법안들에 밀려 좀처럼 논의되지 못했다. '지금은 이 법이 더 중요하니 이거부터 논의하자'라는 식의 논리로부터 무시되고 밀려났다. 그렇게 논의를 미루고 미루다 터진 게 지난 해 해외금리연계 파생결합상품(DLF) 사태다.

은행의 프라이빗뱅커(PB)가 펀드의 기초 자산이 되는 금리를 잘못 알려줘도 투자자들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손실 가능성을 묻자 되레 '독일이 망하겠나'라고 받아치며 무안을 줬던 이들이다. 아예 서류까지 임의로 작성해 '공격투자형'으로 만들기도 했다. 투자는 자기 책임이 원칙이라지만, 적어도 DLF 사태는 그 예시가 될 수 없었다.

원금 전액 손실 등의 소식이 전해지면서 여론이 들끓자, 소관 상임위는 부랴부랴 금소법에 대하 논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정무위원회 문턱을 넘었다. 정무위 논의 과정에서 보다 소비자 측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내용들이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금융시장이 '기울어진 운동장'임을 고려할 때 금융소비자로선 천군만마와 같다.

이러한 금융소비자보호법이 법사위 문턱을 못 넘고 있는 데엔 '이유 같지 않은 이유'가 있다. 여야가 인터넷전문은행법 개정안과 금융소비자보호법안을 패키지로 묶었기 때문이다. 지난 9일 법사위 전체회의엔 두 법안이 같이 상정됐는데, 인터넷전문은행법 개정안이 시중은행에 대한 특혜 법안이라며 일부 의원들이 반대하고 나서자 여야 간 합의에 따라 금소법도 같이 계류 시킨 것이다.

금융소비자보호법에 대한 이견은 이미 그간 정무위 법안심사소위에서 충분히 조정됐다. 물론 법사위에서도 법안에 문제가 있으면 논의할 수 있다. 그럼에도 법사위 여야 의원들은 금융소비자보호법이 인터넷전문은행법과 패키지라는 이유로 논의조차 없이 계류시켰다.

10년을 기다린 후에야 겨우 빛을 보나 싶었던 금소법이다. 정치권은 정치적 이익을 위해 금소법을 패키지로 묶었겠지만, 그렇게 가벼이 다룰 문제가 아니다. 수천만 금융소비자를 인질로 잡아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인터넷전문은행법을 좀 더 논의해야만 했다면, 금소법은 따로 처리를 했어야 하는 게 맞다.

누군가는 정치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비판할 테다. 그렇다면 과연 정치는 누구를 위해야 하는 일인지 되묻고 싶다.

법안이 잠자고 있는 사이 '라임 사태'라는 또 다른 시한폭탄이 금융권을 기다리고 있다. 만기 도래 시 DLF보다 피해 규모가 훨씬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당장 4월부터 라임 펀드의 만기가 시작된다.

마침 20대 국회도 4월이 사실상 마지막이다. 정부에선 국회 종료 전까지 한 두 번 회의가 열릴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거기서도 통과가 안 되면 폐기 수순을 밟는다. 2천년 전, 육가의 말이 여의도에 크게 한 번 울렸으면 한다.

서상혁 기자 hyuk@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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