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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한국 덮친 150년 전 붉은 깃발법의 망령


[아이뉴스24 이현석 기자] "자동차의 최대 속도는 교외에서 시속 6km, 시가지에서 3km로 제한된다. 또 1대의 자동차에는 세 사람의 운전수(운전수·기관원·기수)가 필요하고, 그 중 기수는 붉은 깃발(낮)이나 붉은 등(밤)을 갖고 55m 앞을 마차로 달리면서 자동차를 선도해야 한다. 기수는 보속을 유지하며 운전수에게 말이나 자동차의 접근을 예고한다."

지난 1865년 영국에서 제정된 세계 최초의 도로교통법인 '적기조례'(일명 붉은 깃발법)의 내용이다.

지금 읽어보면 기막힌 법이지만, 당시에는 운송 시장에서 사회 주류를 차지하던 '마부'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당시 태동기에 들어선 영국의 자동차 산업에 치명타로 작용했고, 결국 붉은 깃발법으로 인해 영국은 1862년 세계 최초로 자동차를 상용화했음에도 프랑스·독일 등에게 산업 주도권을 급속도로 넘겨야 했다.

150년이 지난 2019년 대한민국에서도 붉은 깃발법의 망령이 되살아 난 듯 하다. 붉은 깃발법을 만들어지던 시절을 연상하게 하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어서다.

6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부지만 정해진 채 표류하고 있는 '상암롯데몰'이 대표적인 사례다.

서울시는 지난 2011년 6월 복합쇼핑몰 유치를 위해 마포구 상암택지개발지구 3개 필지를 특별계획구역으로 지정했고, 경쟁입찰을 통해 2013년 3월 롯데쇼핑을 낙찰자로 선정한 후 4월 1천972억 원에 매각 계약을 체결했다.

롯데는 계약에 따라 같은 해 9월 개발계획안을 제출했지만, 서울시는 2년 후인 2015년 상생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고 롯데에 인근 전통시장과 상생 합의를 추진하라고 요구했다. 이로 인해 롯데는 판매시설 비율을 82.2%에서 67.1%로 축소하는 신규 계획안을 제출했지만, 서울시는 인근 17개 전통시장 중 1곳이 반대해 상생 합의가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개발계획안 심의를 보류한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상황이 타개될 조짐을 보인 것은 지난 5일이다. 이날 감사원은 '지자체 주요정책·사업 등 추진 상황 특별 점검' 감사 결과를 발표하고, 서울시가 심의 절차를 부당하게 지연했다는 판단과 함께 법적 근거도 없이 '상암롯데몰' 개발을 지연시킨 박원순 서울시장에게 책임을 물었다.

이에 서울시와 롯데는 개발을 위한 계획안 입안 절차에 돌입했다고 밝혔지만, '마포 상암동 롯데복합쇼핑몰 출점 반대 대책위'는 상생 TF에서 인근 전통시장 16곳이 '상암롯데몰' 건설에 찬성했다는 서울시 TF의 자료가 거짓이라며 반대에 나섰다. 이들은 12일 감사원 앞에서 이와 관련된 기자회견도 개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치권에서도 복합쇼핑몰에도 출점규제와 대형마트 수준의 의무휴업을 적용하는 내용이 담긴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 등 법안을 제정하는 것을 통해 이들 단체의 움직임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지난달 29일 열린 더불어민주당 확대간부회의에서 박홍근 을지로위원장은 "복합쇼핑몰은 대형마트보다 몇 배나 더 크면서도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고 지역상권 생태계를 휘젓고 있다"며 "복합쇼핑몰을 합리적으로 규제할 수 있는 유통산업발전법 개정안을 빠르게 통과시켜야 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같은 일부 단체와 정치권의 '합심'한 듯한 움직임은 1865년 당시 영국을 연상시킨다. 새로운 산업이 태동하고, 성장동력 마련이 필요한 시점에 '표심'과 '여론'을 의식한 선심성 규제를 남발해 결국 산업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점에서다. 또 이는 타다 등 신규 모빌리티 서비스와 택시업계의 갈등을 비롯한 '신산업'과 '기존산업'의 충돌을 마주할 때마다 대한민국 정치권이 보이는 일관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물론 복합쇼핑몰이 인근 영세 상인들에게 타격을 입히는 점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생'이 대립하고 있는 두 세력 중 한 쪽의 일방적인 양보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부정하기 어렵다. 이 같은 상황에서 두 세력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타협안을 제시하는 것은 중재자, 즉 정부다. 또 양 측의 주장 중 '반대만을 위한 반대'를 걸러내는 일도 중재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대립하는 두 세력 중 한 쪽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어 제정된 붉은 깃발법은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 악법임이 밝혀졌다. 하지만 30년 동안이나 유지된 것은 '이미 만들어졌다'는 이유에서였다. 때문에 정부는 지금의 규제 행렬이 돌이킬 수 없는 붉은 깃발법을 양산하는 것이 아닌지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현실 문제를 해결한다는 이유로 미래를 버리는 일을 반복할 경우 피해를 입는 것은 결국 지금의 정부가 아닌 미래의 국민이기 때문이다.

이현석 기자 tryon@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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