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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MA를 빛낸 상용화의 주역들


 

지난 1995년 초가을의 어느 토요일 새벽 4시.

이 신새벽에 한국 통신사에 기념비적인 통화가 성공한다. '한국 통신의 꽃' CDMA가 4년의 노력 끝에 실질적인 결실을 맺는 순간이다.

"여보게 이 박사, 우리 통화한 지 얼마나 됐는지 알아? 지금이 4시59분이니까 정확히 59분 통화했는데 1분만 더 지나면 CDMA 통화가 세계 최초로 무난하게 한 시간 통화하게 되는 거야, 세계 최초로…."

당시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 사장이며 CDMA사업단장이던 서정욱 전 과학기술부 장관의 목소리는 감격에 겨워 떨리고 있었다. 그와 통화를 하던 상대방은 이정률 당시 LG정보통신 연구소장이다.

그리고 10월, 이 통화는 경인 지역 고속도로에서 차량 50대와 250명이 동원돼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 CDMA 상용화 필드 테스트로 이어졌다. 이 또한 성공적이었다. 실험실에 있던 CDMA를 마침내 필드로 이끌어낸 것이다.

그렇게 퀄컴이라는 미국의 조그만 벤처 기업이 실험실에서 고안한 CDMA 기술은 우리나라에서 살을 붙여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된 것이다.

또 잘 알려진 대로 CDMA 서비스는 이듬해 1월 본격적인 상업 서비스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지금, CDMA는 반도체, 자동차 등과 함께 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산업으로 우뚝 서 있게 된 것이다.

서 전 장관은 93년 정보통신부 전파통신기술개발추진협의회 의장을 맡아 CDMA 개발을 국가적으로 총괄하는 한편, 1995년 3월부터 한국이동통신 사장으로 민간 업체에서 상용화를 구현한 CDMA 상용화의 주역 가운데 주역.

서 전 장관이 현장에서 CDMA 상용화의 결실을 맛본 주역이라 하면, CDMA의 주춧돌을 깐 주역은 수도 없이 많다고 해야 할 것이다.

2001년 3월부터 2년여간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양승택 전 장관은 92년부터 98년까지 ETRI에서 CDMA 상용화 및 안정화에 기여한 1등 공신으로 평가된다. 당시 양 장관과 같이 일했던 박항구 단장도 주요 인물에 해당한다.

양 전 장관은 최근 "CDMA 개발 주체로 참여할 때 당시 윤동윤 장관이 '이 사업은 내 목을 걸고 진행시키겠다'며 힘을 실어줘서 4년의 기간과 많은 예산이 투입되면서도 진행할 수 있었다"며 공을 윤 전 장관에 돌렸다.

윤 전 장관은 체신부 마지막 장관(40대)으로 93년 2월부터 94년 12월까지 재직하면서, 정책적으로 CDMA의 주춧돌을 깐 인물이다.

또 윤 전 장관으로 하여금 이런 신념을 갖도록 한 사람은 경상현 제1대 정보통신부 장관이다. 경 전 장관은 윤 장관이 체신부 장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ETRI 원장으로서 CDMA 1단계 개발을 주도했던 주역이었다.

경 전 장관은 특히 윤 전 장관에 이어 94년12월부터 95년12월까지 정통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CDMA 상용화의 막바지 작업을 마무리했다.

이밖에 서정욱 전 장관이 당시 서비스업체로 CDMA를 상용화한 주역이라면 장비 쪽에서는 정장호 전 LG정보통신 사장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CDMA란 국가 대역사의 주역을 어찌 이들 유명인으로만 꼽을 수 있으랴. 이들의 정책 결단이 힘을 받고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의 요구대로 묵묵히 연구개발에만 몰두한 국내 정보통신 연구원의 공이 숨어있다.

당시 LG정보통신 연구소를 맡았던 LG전자 이정률 부사장은 "연구원들이 병이 들어 눕거나 수술한 환자도 많았다"며 "특히 몇 달간 집에 못들어 가니까 부인하고 사이가 나빠져 이혼한 연구원도 적잖았다"고 회고하였다.

당시 CDMA 개발에 참여했던 한 연구원은 "9시에 출근해 6시까지 근무하는 게 좋아 보일 지 모르지만 우리가 그런 식으로 일했더라면 CDMA는 없었을 것"이라며 "그래도 당시는 '환장할 노릇'이었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CDMA 신화는 그렇게 수많은 이름없는 이의 눈물과 땀으로 쓰여졌다.

이균성기자 gslee@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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