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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고증으로 탄생한 張씨의 역사 '옥산실록'


현대인들의 가족사 이해에 도움을 주는 내용 담겨

[아이뉴스24 조민성 기자] 족보는 1차적인 의미로 가문의 역사를 적은 기록이지만, 과거의 조상과 현재의 손을 연결해 주는 매개체로 국사(國史)에도 반영돼 후세들 사이의 분쟁을 예방해 주는 역할을 한다.

임진왜란 때부터 시작된 장(張) 씨의 역사를 살펴보고 왜곡된 부분을 바로 잡아 후대에 알려주기 위한 책이 발간돼 눈길을 끈다.

‘옥산실록(장씨천년대동사)’은 현대인들의 가족사 이해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내용이 담겼다. 과거의 조상과 현재의 자손이 공존하는 기록이라고 보면 된다. 장 씨 한 개의 성(姓)을 다루고 있지만 그 의미는 모든 성씨, 나아가 국사와도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저자 장석진은 선조 중종반정 개국공신인 영산군-장한공(張漢公)의 직계 후손이다. 장 씨 대종회 서울중앙회 종사연구위원장과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평생을 역사와 가문에 대해 연구해 왔으며 옥산실록은 그 결과물이다. 참고로 이번에 장 씨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의 일환으로 나온 책은 저작권을 등록한 인명록 편이며 종합편도 연내 나올 계획이다.

옥산실록(장씨천년대동사)를 보면 장 씨 역사를 이만큼 알아내기까지 저자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 수 있다. 50년 동안 사책과 문헌을 추적해 장 씨 인물 무려 7천여명의 사적을 모으고 이를 족보와 대조해 날조된 조상을 가려냈다.

장씨를 포함한 우리나라 역사의 기초인 성씨 역사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단절됐고, 이를 알아내고자 장씨 족보를 조사했으나 그럴수록 혼란은 더 커졌다고 말한다. 저자의 직계 선조인 영산장씨 장한공 조차 구례장씨, 안동장씨로 위조되고 고려 시기 결성인 장하(張夏)는 단양, 예산 장씨 등으로 조작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14~15세기 족보가 양반의 상징으로 여겨지면서 족보와 대동보, 가승, 파보 등이 장사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족보는 그것을 파는 이들에 의해 미화되고 날조되기 일쑤였다. 이렇게 탄생한 부조리가 지금까지 이어져 후손들의 맹신과 불신을 야기하고 있고 저자는 지적한다.

장씨 성은 중국에서 창씨돼 송나라 때 98대에 이르렀다는 설명이다. 우리나라의 씨성과 본관 제도가 정착된 시기는 고려 태조 때이며 이 시기 공신 70여명에게 사성 사관(식읍)을 했는데 이 때 공신 장길(정필)이 장씨 성을 가지게 됐다. 이에 장씨 대부분은 장길(정필)의 후손이며 일부 덕수장씨 장순용과 절강장씨 장해빈 후손으로 대별된다.

여기에서 역사의 왜곡이 숨어 있다고 저자는 책에서 말한다. 장씨의 대성 인동장씨 시조 또한 장장길(정필)임에도 가공의 인물 장금용을 1세조로 족보를 만들었고 그 오류가 그대로 반영된 대동보를 장씨대종회가 후손에게 판매했다.

하지만 고려 태종 공신의 후손에게 대대로 벼슬을 주었던 사초를 근거로 저자는 시조 아래 8대손까지 실제 조상을 찾아내 잘못된 점을 바로 잡았다.

책에는 신라~고려 초 한림, 태사, 학사를 배출하는데 크게 기여한 장문(張門)이 등장하며 대도 장길산, 장녹수, 장희빈, 장희재 등 역사적 인물들이 등장해 흥미를 이끈다.

한편 저자는 영산장씨 족보를 편찬 중으로 전국에 있는 영산장씨들의 고언과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조민성기자 mcho@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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