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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산업을 살리자 - 3] 대한민국 SW기업 '마케팅은 없다'


 

"외국 기업에서는 비전문가도 3개월이면 마케팅 전문가로 변신하지만 국내 기업에서는 마케팅 전문가도 바보가 된다."

대형 외국계 소프트웨어 업체에서 마케팅을 담당하다 국내 소프트웨어 기업으로 자리를 옮긴 A이사는 '국내 SW 업체들의 마케팅 능력이 어느 정도나 된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기다렸다는 듯 이같은 대답을 내놨다.

A이사가 독설에 가까운 말을 퍼부은 까닭은 '우리나라 SW 기업에 마케팅은 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문제제기는 계속된다.

"이제 SW 비즈니스는 마케팅이 중심에 서야 합니다. 그래야 고객들에게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어요. 그러나 국내 업체들은 마케팅을 하려고 해도 고객 데이터조차 제대로 관리가 안되고 있어요. 있어도 쓰레기에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원칙은 없어지고 일선 영업 쪽의 힘만 갈수록 강화됩니다."

A이사는 "이대로 가면 외국 업체들의 공세 속에서 설자리가 점점 좁아질 것"이라고 단언했다.

A 이사의 얘기는 결코 '침소봉대'가 아니다. 대부분의 마케터들이 동의하는 한국 SW산업이 처한 마케팅 부재의 현주소다. SW 마케터들은 지금 "마케팅은 SW비즈니스에서 영업과 개발보다 중요한 경쟁 요소인데 내부 자원은 영업과 개발에만 집중되고 있다"며 "마케팅 부재는 결국 국산 SW는 싸구려란 인식을 고착화시키고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마케팅에 대한 인식 '극과 극'

전문가들은 "세계적으로 성공한 업체들의 비결은 마케팅"이라며 "기업간 기술 격차는 좁혀지고 있지만 마케팅 격차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고 강조한다.

기업 운명을 이제는 마케팅이 좌우하고 있다는 것.

이를 보여주듯, 외국 SW 업체들은 매출의 10% 이상을 마케팅에 투자한다는 것을 명문화하고 있다. 또 마케팅에 대한 투자를 갈수록 늘려가는게 최근의 추세다.

반면 국내 SW업체들은 이같은 흐름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몇몇 업체를 제외하면 마케팅을 '있으면 좋고 없어도 되는' 것으로 취급한다. 제품과 마케팅을 결합한 시너지를 고민하기보다는 어떻게든 제품을 만든 뒤 인맥을 활용해 '일단 팔고보자'식 비즈니스를 펼치는 것이 우리나라 SW 기업들의 현실이다.

마케팅은 개발이나 영업의 보조 역할로만 인식된다. 마케터가 돈 좀 달라고 하면 '쓸 데 없는 데 돈 쓴다'는 준엄한(?) 꾸지람이 내려온다. 마케팅 담당자가 제품 기획단계부터 필수적으로 참여하고 개발, 영업 및 사후서비스까지 비즈니스의 전 영역에서 강력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외국 선진기업들의 경우와 비교하면 처절할 정도다.

그러면서도 세계 최고의 SW업체인 MS를 평가절하하기 위해 "MS는 마케팅 회사일뿐"이라며 깎아내린다. 하지만 'MS는 마케팅 회사'라는 의미는 마케팅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다. 아무리 '세계 최고의 제품'이라고 떠들어봐야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이유를 곰곰히 생각해 볼 때다.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국내 SW 마케팅의 문제는 대략 ▲기업 전략과 마케팅 전략의 불일치 ▲CEO들의 마케팅에 대한 전근대적인 인식 ▲전문성과 비용 부족 등으로 압축된다.

외국계 대형 IT업체에서 국내 SW업체로 자리를 옮긴 Y씨는 "외국 업체들은 기업 목표에 맞춰 세부적인 마케팅 계획을 수립하는 반면 국내 업체들은 기업 전략과 마케팅이 따로 노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또 "국내 업체들의 마케팅은 논리적이지 않으며 전략을 만들어놓고도 안지켜도 그만이란 인식을 갖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 때문에 연초에 세운 계획은 연말에 가면 180도 바뀌어 있는 경우가 많다고 Y씨는 꼬집는다.

대표적인 외국계 SW기업인 한국오라클에서 10년간 마케팅 업무를 담당해온 홍정화 전략기획본부장은 "국내 업체들은 제품 개발과 출시 그리고 출시 이후를 관리하는 프로덕트 마케팅 능력이 부족하다"고 평가한다. 프로덕트 마케팅이 허술하면 광고나 홍보 역시 허술해진다는게 홍 본부장의 설명.

그는 또 "국내 업체들은 제품 포지셔닝 측면에서도 내공이 떨어진다"며 "'모든 유닉스를 지원한다'는 슬로건으로 DB 시장에서 후발주자란 핸디캡을 극복하고 시장을 제패한 오라클과 달리 국내 업체들은 포지셔닝 부분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선진 외국 업체들과 국내 SW업체들의 마케팅 능력을 일대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

그러나 필요성은 느끼지만 여력이 없어 못하는 것과,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상당수 국내 SW업체 CEO들이 필요성 자체를 못 느끼는 쪽에 가깝다.

국내 SW업체들은 경쟁력의 핵심인 마케팅을 '천덕꾸러기' 취급하며 비즈니스을 진행하고 있다. 그 결과 눈 앞의 매출만 좇으며 내일은 기약할 수 없는 '위기의 악순환'을 자초하고 있는지 모른다.

◆마케팅은 천덕꾸러기?

한국 SW업체에서 마케팅 담당자가 영업 사원과 논쟁이 붙으면 결과는 마케팅 담당자의 백전백패다. 영업 담당자들은 돈을 벌어온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큰 소리를 칠 수 있다. 하지만 마케터가 세운 전략은 뒤로 밀려나기 일쑤.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마케팅 담당자는 '비용을 쓰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똬리를 틀고 있다. 개발에 드는 돈은 'R&D 투자'라고 하면서도 장기적으로 매출 확대의 기본 인프라인 마케팅에 쏟는 돈은 그저 '비용'일 뿐이다.

제법 규모가 있는 SW업체서도 이같은 인식은 뿌리깊다.

한글과컴퓨터의 허한범 마케팅 이사는 "마케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다 보니 영업 쪽의 힘만 갈수록 커진다"며 "국내 SW업체들의 마케팅 경시 풍조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국내 SW업체에서 마케팅 담당자로 일하다 최근 자원해서 영업으로 보직을 바꾼 S 과장. S 과장은 마케팅 전문가로 평가를 받아 왔다. 이 때문에 이쪽저쪽에서 스카우트 제의도 많이 받았다.

그런 S 과장이 마케팅 대신 영업을 자원한 까닭은? 이유는 간단하다. 마케팅을 해서는 장기적으로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S 과장은 "한국에서는 영업을 해야 대접 받는다"며 "마케팅을 버린 것에 대한 후회는 전혀 없다"고 잘라 말했다.

SW 마케터들에 따르면 국내 업체에서 마케팅은 그저 영업지원팀일 뿐이다. 마케팅만 전담하는 것도 행복하다. 다른 업무를 하면서 덤으로 수행하는 사례도 많다.

이와 관련, 한국오라클의 홍정화 본부장은 "마케팅 담당자는 회사에 대한 로열티가 가장 높은 사람이다. 하지만 영업이나 기술 담당자에 비해 높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게 우리나라 SW업계의 현실“이라며 안타까워 했다.

◆마케팅에 대한 '참을 수 없는 가벼움'

SW 개발업체 A사. 대규모 정부 프로젝트도 수주하는 등 제법 이름이 알려진 업체다. 그러나 A사 마케팅 담당자가 털어놓는 A사의 비즈니스 실상은 혀를 차게 만든다.

A사는 소프트웨어를 이른바 '공CD'에 구워서 판다. 제품 패키지를 별도로 제작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하지만 회사 이미지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고, 더구나 소프트웨어 대한 '공짜' 인식이 강한 우리나라 현실에서 제품을 공CD에 담아 넘긴다는 것은 마케팅 담당자로서 도저히 그냥 넘기기 어려웠다.

그러나 "제품만 좋으면 인정받는다. 겉포장이 무슨 소용이냐"는 게 이 회사 경영진들의 기본 마인드다.

'쓸데 없는 비용'의 범위에는 매뉴얼도 포함된다. 제품 매뉴얼은 필요할 때 A4 용지에 출력해 주거나 파일로 넘겨준다.

"기업을 한 두 해 하고 말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케팅 담당자는 기업 이미지를 고민하게 된다. 하지만 아주 초보적인 마케팅 얘기만 꺼내도 비용 문제 때문에 뒤로 밀려난다. 이러다 과연 고객들에게 신뢰받은 기업이 될 수 있을지 걱정"이라고 담당자는 안타까워했다.

고객 서비스로 넘어가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고객 서비스 강화는 고객을 유지하고 좀더 많은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반드시 신경써야 하는 부분.

외국 IT 업체들은 '수익의 원천은 더 이상 제품이 아니다, 서비스다'고 강조한다. 그 만큼 서비스의 가치가 중요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국내 SW업체들에겐 '배부른 소리일 뿐'이다.

보안 솔루션 업체 B사. 이 회사는 국내 SW업체들이 고객 서비스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B사에서 마케팅을 담당하는 김모씨는 최근 고객사에 불려가 호되게 당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올라온 고객사 담당자는 "제품에 문제가 있어 연락한지가 언젠데 여태 아무런 반응이 없느냐"며 분을 삭이지 못했다.

회사로 돌아온 김씨는 개발팀에 자초지종을 물었지만 "다른 일도 바쁜데 그거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냐"는 황당한 대답만 듣고 말았다.

◆돈있으면 나도 한다?

상당수 SW업체들이 마케팅 능력 부족을 지적하면 현실론을 내세운다. 당장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무슨 마케팅이냐는 것. 여기에는 마케팅도 다 배가 불러야 할 수 있다는 논리가 깔려 있다.

그러나 배가 부르면 마케팅을 잘 할 수 있을까. 돈이 없어 못하는 것과 마인드가 부족한 것은 분명 다르다.

지난 2002년의 일이다. 외국 서버업체인 T사의 마케팅 담당자는 당시 인터넷에서 벌어지고 있던 '클린 인터넷' 운동에 주목했다. 당시 클린 인터넷 운동은 정부에서도 관심이 많았고 이를 추진하는 단체들도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었다.

T사 마케팅 담당자는 한 단체에 후원금 2천만원을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이 담당자는 기자에게 "앞으로 5년간 서버 25만대가 판매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이유는 이랬다. 클린 인터넷을 위해서는 유해 차단, 스팸메일 차단, e메일 감시 솔루션 등이 필요하다. 결국 클린 인터넷이 운동이 확산되면 이를 받쳐주는 SW 수요가 늘어나고 자연스럽게 T사의 서버도 증가한다는 얘기다.

T사의 사례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거두는 마케팅 전략의 한 사례다. 실현 가능성을 떠나 결국 물건이 팔릴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데 초점이 모아졌다. 파는데만 정신이 팔린 국내 업체의 전략과는 차원이 달랐다. 낚시와 그물의 차이다.

T사 담당자의 얘기는 국내 SW업체들의 마케팅 능력 부족이 인식의 문제이지, 여유가 있고 없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2천만원 정도는 쏟아부을 여력이 있는 국내 업체들도 많다.

이와 관련, 국내 유력 소프트웨어 업체의 마케팅 담당 임원은 "국내 업체가 마케팅을 못하는 것은 규모의 경제가 안돼서가 아니라 CEO의 인식 때문"이라고 못박았다.

이 임원의 지적대로 CEO들의 마인드 부족은 SW마케팅 발전을 가로막는 심각한 장애물로 떠오르고 있다. 또 CEO들의 마인드 부족은 SW업체 CEO들이 대부분 개발이나 영업 출신이라는 사실과 오버랩된다.

안타까운 것은 마케팅에 대한 CEO들의 마인드 부족이 마케터들의 의욕을 단숨에 꺾어버릴 만큼 강력하다는 것.

제품 출시 세미나를 준비중인 마케팅 담당자라면 CEO로부터 "이번 행사로 회사와 제품에 대한 고객들의 인식이 얼마나 좋아질 것인가?"가 아니라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가?"란 질문부터 받는게 현실이다.

많은 마케터들이 이런 경영자의 모습에 씁쓸함을 느끼고 결국 좌절한다. 마케터들이 좌절하는 만큼 한국SW산업의 경쟁력도 추락을 거듭하고 있다.

황치규기자 delight@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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