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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 : 따뜻한 디지털세상] 디지털카메라로 다시 찍어가는 황혼의 길손


 

황사가 걷히고 봄햇살이 화사한 14일 오전 10시 반.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정문 분수대 옆에 '특별한' 디지털카메라 동호회 회원들이 모여든다. 디카를 손에 꼭 쥐고 이름표를 목에 걸고 출사를 나온 이들의 평균 연령은 일흔살.

이들은 '은빛 둥지(원장 라영수)'에서 디카 사진반 활동을 하는 어르신들이다. '은빛 둥지'는 우리나라에서 사실상 유일한 노인 인터넷 모임이다.

"오늘은 풍경 위주로 찍도록 하겠습니다."

'선암 선생님'으로 불리는 김형지(67) 할아버지가 비슷한 또래의 '학생'들을 불러 모은다. 서른 명의 머리 희끗한 학생들 위에 펼쳐진 아주 맑지도, 흐리지도 않는 하늘. 사진 찍기 딱 좋은 날씨다.

오늘의 촬영 대상은 국립 현충원에서만 볼 수 있다는 '수양벚꽃'이다. 정문 분수대 주위와 묘역으로 올라가는 길을 감싸며 늘어선 수양벚꽃을 '흔들림 없이' 찍어야 한다.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S모드로 놓을 경우 셔터스피드는 125분의 1초 이상이어야 한다"는 기본 가르침만 남긴다. "마음대로 찍으면서 스스로 연구해야 사진이 는다"는 게 김형지 선생님의 '교육방침'이다.

지난 3월 3일부터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마다 어르신들은 경기도 안산에 있는 '은빛 둥지' 교육실에서 2시간씩 디지털카메라 사용법을 배웠다. 사진반의 이름은 '디지털카메라로 다시 찍어가는 황혼의 길손(이하 황혼의 길손)'. 노인 기자단으로 유명한 '은빛 둥지'가 경기문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마련한 교육프로그램이다. 디지털 사진 작가모임인 'SLR클럽'에서 활동 중인 선암 선생은 홈페이지 제작법을 배우러 은빛둥지를 찾은 인연으로 사진반 선생님을 맡게 됐다. 홈페이지 제작을 배우는 학생이면서 디지털 카메라를 가르치는 선생인 셈이다.

오전 11시. 어르신들은 담고 싶은 풍경을 물색하느라 바쁘시다. 글자그대로 수양버들에 벚꽃이 붙어있는 것처럼 땅까지 길게 늘어진 수양벛꽃나무 앞에서 "어머나 너무 예쁘네, 너무 좋네" 탄성부터 내놓는다. 한 분은 포즈를 잡고, 한 분은 사진을 찍고 번갈아 한 컷, 두 컷 찍어가며 현충원을 누빈다.

"디카는 참 경제적이야, 그자리서 바로 볼 수 있고 수정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올해 예순아홉살이신 이문경 할아버지가 '디카 찬양론'을 펼친다. 젊은이들이 들고다니는 걸 보기만 했을 때는 다루기가 어려울 것 같았는데 막상 배워보니 인터넷보다 쉽다신다.

"사실 찍는 것보다 컴퓨터에 올리는 게 더 힘들지 뭐."

고혜련(68) 할머니는 디카사진은 컴퓨터 작업을 거쳐야만 빛을 볼 수 있는데 연결 프로그램을 배우는게 가장 힘이 들었다고 말하셨다.

한 달 넘게 디카 다루는 법과 포토샵 사용법을 함께 배운 어르신들에게 이제 웬만한 '뽀샤시 효과' 쯤은 '식은 죽 먹기'다.

그렇게 봄날 풍경을 담은 지 한 시간이 지났을까. 중앙 묘역으로 쭉 뻗은 길에서 삼각대를 세워 놓고 사진을 찍는 권동규(80) 할아버지께 5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 두 분이 다가오신다.

"즉석 사진 얼마에요?"

까만색 렌즈교환식 디지털카메라를 든 권 할아버지가 한 때를 풍미했던 '즉석 사진사'로 보였나보다.

"허허, 공짜로 찍어 드릴테니 메일주소나 가르쳐 주쇼."

권 할아버지가 웃으며 말했지만 아주머니들은 '메일 주소'란 말에 몇 걸음 물러 선다. 본인 것이 없으면 자식들 거라도 불러달라고 하자 아예 가버리는 아주머니들. 순간 팔순인 할아버지가 50대 아주머니들보다 더 젊게 느껴진다.

◆'띠딕' 소리에 담는 은빛시선

'사진은 곧 찍는 이의 시선'이라는 말이 있다. 젊은이들과 똑같은 디카를 사용하지만 어르신들이 담아 내는 눈빛에는 무언가 다른 점이 있었다.

첫 번째 이익선생 기념관에 이어, 현충원을 두 번째 출사장소로 택했다는 소리를 듣고 '어르신들이라 호국영령을 기리시는 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짐작은 틀렸다.

"수양벚꽃을 포함해서 봄 풍경이 현충원만큼 좋은 데가 없어."

호국영령의 뜻을 새기자는 의미도 물론 있지만, 결정적 이유는 '풍경'이었다. 어르신들은 아직까지 '의미'를 담기보다는 '풍경찍기'를 통해 사진의 기본기를 익히고 싶으셨다고 말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찍는 풍경에는 자연스레 '은빛 회한' 같은 것이 묻어났다.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이 '띠딕'하는 디카 셔터 소리에 찍혀 나오는 듯했다.

"6.25 때 피난 가던 생각도 나고, 가족끼리 놀러갔던 생각도 나고... 수양벚꽃보니까 기분이 참 묘해"

이영자(65) 할머니는 한참 벚꽃을 지켜보다 천천히 셔터를 누른다.

"세월 참 많이 변했지... 변했는데 이렇게 디카 사진도 찍고, 인터넷도 하며 젊은 사람들처럼 지내니 얼마나 좋아."

어르신들에게 디카사진이란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담으면서도 현재의 젊은 감각과 소통하는 '고마운 도구'였다.

◆"손주사진도 찍고, 영정사진도 찍을 랍니다"

'황혼의 길손' 사진반 어르신들은 처음 디카를 만져보는 분부터, 작품전을 열만큼 프로급 수준을 가진 분까지 실력이 다양하다. 다른 곳 같으면 '수준별 학습'을 하겠지만 어르신들은 '평준화'를 고집하신다.

사진배우는 것도 좋지만 '노년을 즐겁게 보내고 싶다'고 뜻을 같이 한 사람끼리의 만남이 더 좋기 때문이다. 실력이 좀 나은 이가 초보자를 도와가며 한 컷 한 컷 찍어 나가다 보면 회원간 결속력은 자연히 끈끈해 진다.

"나에 대한 마지막 투자라 생각하고 55만원짜리 디카를 샀지...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해."

'남학생'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다는 김영애(71) 할머니. "아들이 결혼해서 아기 낳으면 내가 매일 사진 찍어 홈페이지에 올릴 거야" 아직은 초보지만 미래에 태어날 손자의 '육아앨범'을 만들겠다는 포부가 '당당'하다.

자식들의 열광적인 호응도 어르신들이 사진반 활동을 하는 원동력 중의 하나다.

"문자부터 시작해서 인터넷 배운 지가 1년이야. 중2짜리 손자가 할머니를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는 지 몰라."

이렇게 말하는 박춘지(65) 할머니는 회원마다 가지고 있는 개인 홈페이지에 찍은 사진을 올리면 자식들이 방문해 글을 남긴다고 소개했다.

'황혼의 길손' 사진반은 올 10월까지 8개월 과정으로 짜여졌다. 회원들이 디카사진 찍는 법과 수정하는 법을 숙달하게 되면 전시회도 열 계획이다.

어르신들은 또 '은빛 둥지'에서 계획하고 있는 '1천명 영정사진 찍기' 자원봉사에도 참여할 계획을 갖고 있다. 비슷한 또래의 '영정사진'을 찍으면서 함께 '마지막'을 준비하고자 함이다.

오후 12시 반. 나름의 풍경을 디카에 꼭꼭 눌러 담은 어르신들이 다시 처음 모였던 분수대 근처로 모여 든다. 안산 '은빛 둥지'로 돌아가 3시부터 포토샵 공부를 하기 위해서다.

서른 여섯 대의 중고 컴퓨터에 빼곡히 앉아 수업을 듣는 어르신들을 상상하니 '디지털세상이 이분들에게 '사이버 청춘'을 드렸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회원들에게 포토샵 강의를 직접하는 라영수(66) '은빛둥지' 원장은 "앞으로 캠코더를 이용한 동영상작업도 교육할 예정"이라며 "취미로 시작하신 분들이 직업으로도 기술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젊어지고 싶어 디카를 배운다"는 어르신들. 노년의 몸에서는 이미 봄 기운같은 젊음이 한 껏 뿜어 나오고 있었다.

김연주기자 toto@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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