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자루를 쥔 자가 바뀌면 앞서 맺은 약속을 휴지조각처럼 버리는 게 후진국의 모습이다. 우리 기업들 가운데 후진국 정부나 기업들과 큰 계약을 맺고도 하루 아침에 정책방향이 바뀌어 낭패를 당하는 소식을 종종 접하곤 한다.
방송통신위원회가 3일 인터넷전화(VoIP) 번호이동성 도입 재논의를 결정한 과정은 우리의 현실이 남얘기 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인터넷전화는 방송통신위가 지난 5월 대통령 업무보고를 위해 만든 자료에서 조차 시내외 통화에서 일반전화보다 80% 저렴하다고 밝히고 있다. 대신 070 식별번호가 붙어 스팸전화처럼 취급됐다. 긴급통화시 자동으로 위치추적이 안되고, 정전되면 전화를 사용할 수 없으며, 보안성이 떨어진다는 단점은 지녔다.
인터넷전화 번호이동제 도입은 070 식별번호를 떼고 기존 집전화 번호를 그대로 쓸 수 있게 해 활성화하자는 것이다.
방송통신위원들은 이날 전체회의에서 "문제점이 중요하니, 시간을 두고 논의하자"고 합의했다. 최시중 위원장은 "현재의 전화가 문제가 있어서 도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다. 이용자 편의성 측면에서 도입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용자 편의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인터넷전화 번호이동제가 빨리 실시돼야 한다.
인터넷전화가 기존 유선전화(PSTN 전화)와 100% 같은 품질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요금이 더 싼 것이고, 개선할 필요성도 있다. 그럼에도 소비자에게 직접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
산간오지에 거주하거나 도시 저소득층도 긴급통화 때 119에서 위치를 자동으로 알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산간오지엔 초고속인터넷 망이 깔리느냐는 문제가, 저소득층은 2만~3만원 가량 고정비용이 들어가는 초고속인터넷에 가입하느냐가 현실적으로 걸리는 문제다.
또한 산간오지에서 초고속인터넷을 가입한다면 그 대상은 전국망 구축 의무를 가졌던 KT일 가능성이 높고 이 경우 자동 위치추적이 다른 인터넷 전화 사업자들보다 수월하다는 것은 방통위도 알고 있다.
따라서 긴급통신 지원이 100% 완벽하지 않다는 이유로 번호이동을 불허하기 보다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긴급통화대책, 이를테면 통신사업자연합회를 통한 각 지역 소방소 연결 등과 인터넷전화 가입시 긴급통화 문제 발생 가능 등을 소비자에게 충분히 고지하는 단서를 달아 번호이동을 허용하는 게 합리적일 수 있다.
지금 불거진 문제점들은 가깝게는 1년 전, 멀게는 3~4년 전 인터넷전화 도입의 필요성을 얘기할 때 나왔던 것의 재탕이다. 옛 정보통신부는 작년 연말부터 올해 초까지 시범서비스까지 실시해가며 인터넷전화 도입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기업들은 이에 발맞춰 투자 및 서비스를 준비했고, 정부는 가계통신비 절감방안의 하나로 인터넷전화를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형태근 위원은 이날 위원회의에서 실무자에게 "단점은 이미 지난해 3월15일 로드맵에서 적시된 내용이며 충분히 검토가 된 것이다. 지난 1년 동안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는가?"라고 반문했다. 문제점 개선 노력은 하지 않은 채 약속한 시점을 넘겨 문제점에 대한 논의를 재개하는, 방통위 조직의 '직무유기'를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준비부족으로 한두 달 시행이 늦어지는 것이 아니라 방통위의 규제 예측성이 떨어진다는 점이다.
방통위 관계자는 노골적으로 "모든 사안을 원점에서 재검토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며 "옛 정통부가 아니다. 방통위는 다른 조직"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식의 논리라면 정보통신부 시절 부여했던 사업자들의 인허가부터 다시 내줘야 한다.
/강호성기자 chaosing@i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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